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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닝뉴스 &gt; 역사되짚기</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section.html?section=20</link>
<description>모닝뉴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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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시, ‘거제와 조선 전기 통신사’ 학술대회 개최</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211253687493020</link>
<description><![CDATA[ 거제시는 지난 19일 거제시청 중회의실에서 ‘거제와 조선 전기 통신사 역사적 규명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조선 전기 조일 외교의 관문이자 요충지였던 거제의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 통신사의 여정과 거제 지역의 역사적 관련성을 학술적으로 규명하고자 마련됐다.

경남연구원 오동호 원장은 개회사에서 “거제는 선사·고대부터 해상 교류의 중심지로서 조선 전기에는 대마도와 일본으로 향하던 사행단이 항해를 준비하던 중요한 거점이었다”라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거제 해양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어 옥주원 문화관광국장은 환영사를 통해 “학술대회에서 도출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거제의 역사·문화자원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해 나가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뜻을 밝혔다.

이날 학술대회는 한태문 부산대 교수의 ‘조선통신사와 한일 문화 교류’ 기조강연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심민정 부경대학교 해양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의 ‘조선전기 거제와 한일관계’, 이창희 국립한국해양대학교 교수의 ‘조선전기의 기록을 통한 조선통신사 지세포 출항 검토와 현대적 항로재현에 따른 새로운 함의’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박화진 부경대학교 명예교수가 주재한 종합토론에서는 조선 전기 통신사와 거제 지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문헌사 및 해양학적 관점에서의 다양한 해석과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거제시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 전기 거제의 외교적 위상을 확고히 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증 연구와 학술조사를 통해 거제의 역사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이를 지역의 문화·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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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Mon, 22 Jun 2026 16:15:3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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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 수정산성 사적지정 기념식 개최</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6291014386800020</link>
<description><![CDATA[거제시는 11일 오후 2시 거제시 농업개발원 잔디광장에서 ‘거제 수정산성 사적지정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최근 거제 수정산성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고, 수정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국가유산청이 주최하고 거제시가 주관한 기념행사에는 시민과 역사 전문가, 지역 문화단체 등 100여 명이 참여해 수정산성의 국가사적 지정을 함께 축하했다.

행사에서는 수정산성의 사적 지정 경과 보고, 감사패 전달, 국가유산청의 사적지정서 교부 등이 진행됐다. 

감사패는 그간 수정산성의 보존과 사적지정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남성곽연구소 나동욱 소장, 한국성곽연구소 심광주 소장, 재단법인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동상마을 신승래이장, 서상마을 박주영 이장에게 전달됐다. 

국가유산청은 이 자리에서 수정산성 사적 지정서를 공식적으로 교부해 수정산성이 국가유산으로서 지닌 상징성과 보존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행사 후반에는 축성비문 낭독과 축하공연이 이어져, 지역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특히 마지막 순서로 참가자들이 직접 역사적 현장을 체험하는 수정산성 현장 답사가 진행돼 더욱 뜻깊은 시간을 만들었다.

거제면 동상리의 수정봉 정상에 위치한 거제 수정산성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주민들이 힘을 합쳐 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곽 축조기술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8월 19일부터 30일 동안의 사적 지정 예고 절차를 거쳐 10월 30일 수정산성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이번 거제시의 사적 지정은 2010년 둔덕기성이 사적으로 승격된 이후 15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 성곽문화유산으로는 두 번째 지정이다. 특히 거제 옥산성이 도 지정유산으로 지정된 지 51년 만에 거둔 의미있는 성과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사적의 보존 및 관리를 위한 국도비 지원이 확대돼, 문화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조사와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변광용 거제시장은 “사적 지정을 새로운 시작으로 맞이하고 향후 수정산성을 자주 찾아오실 수 있도록 국가유산청과 협렵, 체계적인 보존 관리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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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Wed, 12 Nov 2025 10:15:4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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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 가배량진성 역사적 가치 재조명한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5876217686601020</link>
<description><![CDATA[조선시대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었던 남해안 방어의 핵심 거점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중대한 위상을 지닌 유적인 가배량진성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거제시와 경남연구원은 오는 26일 오후 1시 20분 거제시농업기술센터에서 '거제 가배량진성의 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25일 밝혔다.

주최 측은 "이번 학술대회는 가배량진성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심도있게 제조명하고 국가사적 지정의 필요성과 그 의의를 한층 더 드높이기위해 마련된 뜻깊은 자리"라고 전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이재명 (경남연구원), 심종훈(동아시아문화재연구원),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심광주 (한국정책연구소) 등이 주제별 발표를 맡았다.

토론회 좌장은 박종익 (국가유산청), 토론자로는 김병근 (문화유산연구소), 정용남 (동서문물연구소), 나동옥 (영남성곽연구소), 이수진 (동신대학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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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조은옥  기자</author>
<pubDate>Thu, 25 Sep 2025 10:02:5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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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 와 '독로국'… 역사 규명 학술대회 개최</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5306256086298020</link>
<description><![CDATA[거제시(시장 변광용)와 경남연구원(원장 오동호)은 지난 18일(금), ‘거제와 독로국 역사 규명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독로국은 중국 고대 문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그 구체적인 위치는 오랫동안 역사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학계에서는 ‘거제설’과 ‘동래설’이 있지만 거제설이 주류이다.

특히 최근 고고학 및 문헌 연구를 통해 남해안 지역 특히 거제가 독로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이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거제시는 지역의 뿌리를 찾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번 학술대회를 마련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고고학·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기까지의 유적·유물 및 문헌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거제와 독로국의 연관성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의 ‘고대 한일교섭의 가교, 거제도’ 기조 강연을 시작으로, 주제 발표는 윤호필 상주박물관장과 배길희 경남연구원 조사연구원이 거제지역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와 네트워크, 김준식 경남연구원 조사연구위원이 삼한·삼국시대 거제지역 고고학적 양상, 안홍좌 국립창원대학교 강사가 문헌으로 본 독로국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진 종합 토론은 국립창원대학교 남재우 교수를 좌장으로 독로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제시했다.

변광용 거제시장은 “이번 학술대회는 거제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고,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거제시는 지역의 역사 문화 자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거제시는 이번 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로국 관련 유적에 대한 조사연구 및 보존활용 방안도 함께 모색할 것이며, 나아가 역사 자원을 통한 지역 문화·관광 활성화와 교육 콘텐츠 개발 등 다양한 방향으로의 연계 발전도 검토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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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Mon, 21 Jul 2025 10:49:2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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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항일의병장 이사언 후손 어디에 사나</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43944476568567020</link>
<description><![CDATA[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받고도 서훈을 받지 못한 경남 합천군 봉산면 출신 이사언(李士彦 1878~?) 의병장의 안타까운 사실이 지역사회에 알려지자 합천지역 사회단체가 나서 후손 찾기와 함께 정부에 서훈을 신청키로 했다.

 이사언 의병장의 후손 찾기를 주도 하고 있는 합천문화원(원장 전정석)과 합천인터넷신문(대표 김무만) 경남독립운동연구소(소장 정재상)는 합천군민과 지역 언론인을 대상으로 이사언 의병장을 적극 알리며 후손 찾기에 나서는 등 지역민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사언 의병장은 1878년생으로 당시 삼가군 모태면 기장실(현, 합천군 봉산면 양지리 기장실) 출신으로 1907년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동의 경남창의대에 소속되어 일제치하에 있던 산청경찰서와 군청 합천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는 1908년 이학로 의진에서 별포장(別砲將)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돼 대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확정 받았다.

이사언 의병장 후손 찾기에 나선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이사언 의병장은 일제에 맞서 싸우다 체포돼 15년형의 옥고를 치렀지만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며 “광복 70년의 해인 올해는 이분의 후손을 꼭 찾아 서훈 신청과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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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hu, 13 Aug 2015 14:46:0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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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주독립만세 운동일은 1919년 4월 3일</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43158372767369020</link>
<description><![CDATA[경남 거제 아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일은 1919년 5월 2일이 아니라 4월 3일이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거제시민의 애국심을 알리는 아주지역 독립만세 운동은 지난 2011년부터 5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아주독립만세운동일은 그동안 5월 2일로 알려져 왔으며 기념식도 ‘아주 5·2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 로 치러져왔다. 

그러나 최근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에서 펴낸 ‘거제지역 독립운동 사료수집사업 보고서’ 에서 아주독립만세운동이 당시 양력 5월 2일이 아닌 양력 4월 3일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됐다.

거제시는 이같은 논란을 종식시키고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지난 4월 국가보훈처에 사실확인을 요청했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거제시에 보내온 회신을 통해 일제강점기 판결문에는 사건의 일자를 기술할 때 주로 양력을 사용했지만, 음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날짜 앞에 ‘음(陰)’ 또는 ‘구(舊)’란 글자를 기입해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있으므로 아주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이인수, 이주근 선생의 판결문상에 표기된 시위운동을 일으킨 4월 3일은 음력을 뜻하는 글자가 없으므로 양력 4월 3일로 확인된다고 회신했다.

이에 따라 거제시는 행사를 주관하는 아주동번영회와 협의, 2016년 행사부터 행사를 4월에 개최하고 행사의 명칭도 ‘아주 5·2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 에서 ‘아주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 등으로 변경할 계획이다.

아울러 우리지역에 유일한 독립운동행사이고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감안, 행사의 규모를 확대하는 등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hu, 14 May 2015 15:08:47 GMT</pubDate>
</item>
<item>
<title>박동의 경남창의대 ‘의병장 14人’ 戰史 발굴</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42474052566267020</link>
<description><![CDATA[한말 을사늑약 (1905년) 이후 영·호남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일제에 맞서 싸운 경남창의대 소속 의병장 박춘석(朴春碩 하동)·이백인(李伯仁 하동)·권인수(權仁壽 울산) 등 14인의 전사(戰史)가 향토사학자에 의해 광복 70년 만에 빛을 봤다.

자료를 공개한 향토사학자는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

정 소장은 “국가기록원 문건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4년 폭도수괴 조사표(1910년·경무국) 등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항일의병장 6인의 부대규모와 인적사항 그리고 활약상이 추가로 밝혀진 의병장 8인의 문건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춘석·이백인·권인수 등 14인 의병장은 산청출신 박동의 경남창의대 소속으로 지리산 일대인 하동·산청·함양·합천·거창·의령·함안·진주·구례·남원 등지에서 10∼15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1910년 이후까지 무장투쟁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 문건에서 밝혀진 것은 하동 박춘석(화개면)은 부하 20∼80명, 울산 권인수(울주군 언양읍 다개리) 부하 30∼100명, 하동 이백인(횡천면) 부하 10∼50명, 출신지 미상 김성구  부하 40∼150명, 前승지 이기선 부하 30∼100명, 前승지 이영칠 부하 30∼100명이다.

그리고 1908년까지 항일투쟁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윤영수(윤승지·진주) 부하 30∼100명, 종경도(송경도·산청) 부하 30∼100명, 장세경(산청) 부하 30∼100명, 이백응(하동) 부하 10∼50명, 김대수(하동) 부하 10∼50명, 이주칠(진주) 부하 20∼80명, 조도인(진주) 부하 30∼100명, 이만구(사천) 부하 10∼50명으로, 1910년 이후까지도 항일투쟁을 벌인 것으로 이번 문건을 통해 밝혀졌다.

이들 의병장은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과 고종이 퇴위되자 지리산 일대인 산청에서 박동의·윤영수 대장을 중심으로 1000여명의 동지들과 경남창의대를 결성하고 이학로(경북영천)·박인환(박매지 하동)·권석도(함양)·조인환(산청) 등과 함께 영·호남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림1중앙#
특히 14인의 의병장은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의 지휘 하에 1908년 3월 26일 산청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해 불태웠고, 4월 8일 합천우체국을 공격했으며, 같은 해 6월과 8월에는 남원 입석수비대와 하동수비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가했다.

1909년 2월과 6월에는 이학로(영천)·서병희(양산) 등과 함께 함안군 산외면 일본인 집과 함안 칠원경찰서를 습격했으며, 7월에는 진주 일대에서 박인환·권석도·이학로·하영옥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며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이학로·조인환 등과 함께 하동군 옥종면 월횡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조인환(산청) 등 13명이 전사했다.

정 소장은 이번 문건과 관련해 “일제는 1907∼1909년 의병진압을 위한 남한 토벌작전을 벌여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많은 의병을 사살·체포 또는 해산시켰다”며 “이로 인해 1910년 이후 의병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이번 기록에 나타난 의병장들은 한일병탄 이후까지도 지리산에 남아 유격전을 펼친 몇 안 되는 의병장”이라고 밝혔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ue, 24 Feb 2015 10:15:25 GMT</pubDate>
</item>
<item>
<title>청계사 불교경서 6건 유형문화재 지정</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9648796462300020</link>
<description><![CDATA[경남 하동군 옥종면의 청계사(주지 지산스님)가 소장한 불교경서 6건이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3일 하동군에 따르면 경남도는 최근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53호로 지정하는 등 청계사가 소장한 불교경서 6건을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고시했다.

하동군의 경남도 지정 유형문화재는 기존의 제28호 쌍계사 석등 등 26점을 포함해 모두 32점으로 늘었다.

이번에 지정된 유형문화재는 △권수정혜결사문을 비롯해 △제554호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제555호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六道普說) △제556호 법화영험전(法華靈驗傳) △제557호 정토보서(淨土寶書) △제558호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 등이다.

‘권수정혜결사문’ 은 고려 중기 지눌 고승이 승려들에게 선정과 지혜를 닦을 것을 강조하며 찬술한 경서로, 지난 1608년 송광사에서 간행했으며, 시주자에 대한 기록 및 인출·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전문(全文)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소’ 는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을 저본으로 당나라 징관(澄觀)이 소(疏)하고 송나라 정원(淨源)이 주해한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더불어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119권 40책으로 돼 있다.

‘몽산화상육도보설’은 몽산덕이가 대중을 모아 육도윤회(六道輪廻)를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토보서’는 염불법문에 의지해 정토의 업을 닦고 일과 염불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경서다. 

‘법화영험전’은 고려 말 승려 요원(了圓)이 당나라 혜상(慧詳)의 ‘홍찬전(弘贊傳)’, 송나라 종효(宗曉)의 ‘현응록(現應錄)’, 고려시대의 ‘해동전홍록(海東傳弘錄)’ 등에서 묘법연화경을 수지·독송·서사·강해함으로써 얻게 되는 갖가지 영험담을 모아 수록한 2권 1책이다.

군 관계자는 “이번에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경서는 1957년 입적한 경하 스님이  지산 주지스님에게 물려준 고문헌으로, 불교의 교리 문헌연구와 불교서적 출판문화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 된다” 고 말했다.

한편, 하동군 옥종면에 소재한 청계사는 지난 1972년 지산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등을 갖추고 있다.
]]></description>
<author>서혜정 기자</author>
<pubDate>Thu, 03 Apr 2014 10:19:24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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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북인 정체성 다룬  '경북독립운동사 ' 완간</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9520963361893020</link>
<description><![CDATA[경북인의 독립운동 정신과 그 활동을 집대성한 ‘경북독립운동사 ’ 7권 발간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고 19일 경북도가 밝혔다.

‘경북독립운동사’ 발간은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맡아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책임연구원), 권대웅 대경대학 교수, 권영배 계명대학교 겸임교수,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등 20명의 전문 연구자들이 집필했다.

경북독립운동사는 철저한 사료 조사와 현장 고증 등을 통해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소중한 역사를 조명해 경북 독립운동의 내용과 위상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이 책은 경북지역 각 시&#8228;군 및 국공립도서관, 교육기관, 문화원, 연구기관과 전국의 광역시&#8228;도, 4년제 대학교 연구기관 등에 배부해 경북인의 나라사랑 정신과 활동을 알리게 된다.

경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은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인원은 지난해 말 기준 전국 1만3403명 중  2036명으로 15%를 차지해 전국 최고 수준이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광역자치단체의 포상자 수가 대체로 1000명 미만인 것을 감안하면 경북이 갖는 위상은 매우 높다.

박의식 경상북도 보건복지국장은 “우리 경북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조국과 후손에 대한 사명감과 정체성으로 목숨 걸고 감행됐다. 타 독립운동가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어가야 할 경북의 혼이며, 한국 정신문화의 으뜸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어 우리의 귀한 정신사적 유산이 더욱 빛을 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올바른 정체성 확립에 큰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description>
<author>서혜정 기자</author>
<pubDate>Wed, 19 Mar 2014 15:13:53 GMT</pubDate>
</item>
<item>
<title>경북, 인문·관광소재 동학 재조명사업 펼친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9451990661664020</link>
<description><![CDATA[경상북도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인문·관광소재 동학 재조명 사업’ 을 추진한다고 11일 발표했다. 

‘인문·관광소재 동학 재조명 사업’ 은 한국 사상의 글로벌 브랜드화 및 인류 공동의 유산화를 위해 상주 동학교당의 국가지정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상주 동학교당의 동학대전, 동학경전 발간물과 목판 등 289종, 1425점의 유물은 근대 한국 종교문화, 국문학, 민속학 등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근대 인쇄술 및 인쇄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아 지난해 말 안전행정부 국가 기록원이 국가지정 기록물 제9호로  지정·고시했다.

세계인이 공감하는 시대정신이자,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간 존엄 사상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 하고자 했던 농민들의 열망이 담긴 동학 사상의 기록 유물은 세계적 가치가 있다.

도는 동학 120주년 기념사업으로 동학마을 축제, 전국단위 동학 전문가 초청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기존 추진 중인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과 동학 태동지 ‘동학예술제’ 도 적극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동학마을 축제 개최로 추모와 체험,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동학의 사회적 인식 및 흥미 제고를 위해 동학 전통 복식의 재현, 동학교도 체험, 음식과 건강을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인문·관광소재로서 동학 체험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한, 한국 근대사에서 경북 동학정신의 위상을 확인하기 위한 전국단위 동학 전문가 초청 학술 세미나를 개최해 여러 지역에서 지지를 얻었던 동학의 소통 정신을 공유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아갈 계획이다. 

현재 동학 발상지 성역화사업으로 경주시 용담 일대에 추진 중인 최제우 선생 생가 복원, 수운 기념관 및 수련관 건립사업이 2009년 ~2016년까지 8년간 총사업비 100억원(국70, 도9, 시 21)으로 추진 중에 있고,동학예술제 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또한, 경상도 개도 700주년을 기념한 경상(경주, 상주)동학 탐방로 발굴과 동학사상과 농민혁명의 융합을 위해 기 구축된 관광 인프라간의 연계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전국단위 동학기념사업 기관과의 상시 공유 소통 채널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김남일 경상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해 온 동학 정신을 인문·관광소재로 재조명해 현대적으로 계승해 글로벌 ‘한국학’의 영역 확장, 세계가 공유하는 사상과 유물로 승화시켜 한국 정신 문화 세계화를 경북이 선도해 나갈 계획” 이라고 밝혔다. ]]></description>
<author>서혜정 기자</author>
<pubDate>Tue, 11 Mar 2014 15:38:2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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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항일의병장 등 259명 학살문건 찾았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9329376861411020</link>
<description><![CDATA[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경남 하동지역 향토사학자가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명의 문건을 찾아 신원이 확인된 의병장 41명을 정부에 서훈 신청하고 명단을 공개했다.

이번에 문건을 찾아 서훈을 신청한 향토사학자는 정재상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

정 위원장이 찾은 문건은 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1909년 국내에서 50 ~ 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 숱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 때 체포돼 총살당하거나 목이 잘리고 칼에 찔려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활동 내용이 담겼다.

정 위원장은 “이번 자료는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 소장)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 ‘조선 폭도토벌지’ 등에서 미 서훈 항일의병장 41명(경남 12명·경북 14명·전남 8명·전북 5명·강원 2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학살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이 찾은 문건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하동출신 정승유(鄭勝有) 의병장의 체포·탈옥·총살과정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칼로 도륙당한 합천출신 신상호(申相鎬) 의병장, 의령의 문봉래(文奉來) 의병장, 강원도 삼척 육백산을 중심으로 대활약을 펼친 김수영(金壽榮) 의병장, 경북 경주의 권문선(權文善) 의병장이 확인됐다.

또 체포된 후 일본군 숙사에서 머리가 박살나 처참하게 순국한 전남 곡성의 손학곤(孫學坤) 의병장, 경남 함양에서 마을이장으로 활동하며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총살당한 김찬언(金贊彦) 의병장, 일본군에 체포된 후 칼에 찔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전북 장수의 박재근(朴在根) 의병장, 목이 잘려 순국한 진안출신 김진명(金辰明) 의병장이 포함됐다.

한말 한병(군인) 출신으로 의병대의 훈련교관을 지내다 체포돼 총살당한 하동출신 이덕길(李德吉) 의병장 등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41명의 의병장과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50명이 학살당한 문건이 이번에 처음 알려졌다.

정 위원장은 “이번 문건에 드러난 의병장의 학살은 ‘도주를 기도함에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했다”며 “항일의병장을 죽이는 명분이 모두 도주라는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쓰며 항일투사들의 학살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또 “체포된 항일의병장을 고문한 후 마지막에는 목을 자르고,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칼로 잔혹하게 찔러 죽여 놓고 그들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고 밝히고 있어 정말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덧붙였다.

정 위원장은 “이번에 찾은 41명의 의병장에 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서훈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미 서훈자로 밝혀졌다”며 “이번 문건은 의병장들의 뚜렷한 항일기록이 있는 만큼 독립유공자 서훈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 서훈신청자 공적요지</b>

◇ 강원 2명
△ <b>김수영(金壽榮 ∼1907. 12. 19·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도 육백산(六百山)·탕실(湯實)·석개(石開)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17일 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12월 19일 총살됐다.

△ <b>김성산(金成山 ∼1907. 11. 18·강원도 태백시 황지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강원도 삼척군 장성면 황지(黃池)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1월 18일 소백산맥에 있는 강원도 황지 및 경북 봉화군 고직령(古直嶺) 부근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의병 50여명이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전사하고 그는 체포돼 격살(擊殺)됐다.

◇ 경남 12명
△ <b>정승유(鄭勝有 ∼1908. 12. 15·경남 하동군 진교면)</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박매지 등과 함께 하동·산청·진주 등지에서 의병 300여명을 규합,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정승유는 1908년 7월 중순 하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하동경찰서 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그는 먼저 수감돼 있던 박인환(박매지)·권석도 등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그는 이후 계속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해 12월 15일 하동진교에서 다시 체포돼 압송되던 중 하동군 양보면 봉곡촌(鳳谷村)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총살됐다.

△ <b>신상호(申相鎬·36세, 1872~1908. 8. 31·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산 일대와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합천군 삼가 평구(平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휘하 의병 4명과 함께 체포됐다. 이후 일본군은 신상호 의병장만 칼로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

△ <b>김홍대(金弘大 ~1907. 10. 28·일명 김창석·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함양·산청·남원·무주·장수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12일과 13일 함양남방 약 50리 지점인 마천면 추성(楸城)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으나 의병 10명이 전사했다. 이후 김홍대는 10월 28일 오전 6시 함양군 북방 약 150리 부근 대곡동(大谷洞)에서 체포돼 총살됐다.

△ <b>백운하(白雲下 ~1908. 8. 21·경남 밀양 무안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밀양과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1일 밀양군 무안동(密陽郡 武安洞) 부근에서 의병 6명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됐다. 이날 백운하 의병장을 비롯한 7명이 총살됐다.

△ <b>이두익(李斗益 ~1908. 5. 20·경남 삼가군 모고면)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합천·삼가·거창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는 특히 손태주(孫太朱·마산), 이준명(李俊明·성주), 영기선(榮基善·영산) 등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년 4월 8일 합천 우체국을 공격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삼가군 모고면(毛古面)에서 체포돼 총살됐다.

△ <b>이안옥(李安玉 ~1908. 8. 31·경남 함양군 휴천면 목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함양·산청·진주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 8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함양군 동남쪽 15리 목동(木洞) 부근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체포돼 산청군 서방 약 40리 오봉산(五峯山)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동지 2명은 9월 2일  함양군 추성(楸城) 남방 40리에서 총살당했다.

△ <b>김순오(金順吾 ~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함양군과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수십명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 15일 김찬언(金贊彦) 등과 함께 함양군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총살됐다.

△ <b>김찬언(金贊彦 ~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 일대인 함양군 마천면 창촌(倉村)에서 마을 동장(洞長)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 15일 같은 마을 김순오(金順吾)와 함께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 <b>김진규(金振奎 ~1908. 4. 25·경남 거창군 가북면 심방)</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거창에서 유종환(兪宗煥)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며 거창인동·신방·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5일 유종환, 김진규 등 의병 24명이 거창군 인동(거창 동북 약30리)에서 숙영했다.

  이후 이들은 거창 동북방 약45리 심방(尋芳)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김진규를 비롯한 의병 9명이 전사하고 유종환 등 4명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 <b>문봉래(文奉來 ~1908. 6. 7·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동)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의령·창녕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 6일 의령북방 약30리 부근 갑을동(甲乙洞)에서 문봉래가 지휘하는 의병 50명이 주둔했다. 이후 문봉래 의진은 6월 7일 갑을동 부근 양성동(陽成洞) 학교에서 숙영 중 새벽 2시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문봉래를 비롯한 의병 12명이 전사했다.

△ <b>성만석(成萬石 ~1908. 8. 3·경남 합천군 삼가면 목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황매산일대인 삼가군·합천군 등지에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일 삼가군 서북 35리 부근인 목동(木洞) 서남 5리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성만석을 비롯해 5명이 전사했다.

△ <b>이덕길(李德吉 ~1909. 3. 21·경남 하동군 악양면)</b> 의병장은 한말 한병 상등병(군인) 출신으로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하동·산청·함양·진주·구례·곡성· 광양 등지에서 이학로, 박매지, 황낙현, 노성화, 최경순, 우수보, 권석도, 전재수, 심상근, 이춘이, 김채홍, 송명운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는 특히 의병대의 훈련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14일 산청군 백곡면(栢谷面) 신대리(新垈里)에서 일본군 매계(梅溪)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됐다. 이후 그는 3월 21일 총살됐다.

◇ 경북 14명
△ <b>권문선(權文善 ~1908. 5. 28 ·경북 경주군 산내면 감존)</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북 경주군 일대에서 의병 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28일 경주군 감존(甘存)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체포돼 총살됐다.

△ <b>김성달(金聖達·27세, 1880~1907. 9·경북 문경군 신동면 노목)</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일원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된 후 발각돼 총살됐다.

△ <b>김용출(金用出·25세, 1882~1907. 9·경북 화안군 달미면 광동리)</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경북 일원에서 60여명의 의군을 조직해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돼 총살됐다.

△ <b>김직현(金直玄·32세, 1875~1907. 12. 14·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주출신의 이모(李某) 의병장과 함께 1907년 초부터 영천·청송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14일 영천군 신촌면 하란동(新村面 下蘭洞) 부근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 후 순국했다.

△ <b>박인시(朴仁是 ~1908. 8. 26·경북 고령군 명곡)</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고령과 경남 거창 일대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6일 의병 20여명과 함께 경북 고령군 서북방 약35리 지점인 명곡(明谷)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휘하의병 15명이 전사했다. 이날 박인시 의병장은 체포돼 총살됐다.

△ <b>이로침(李魯浸 ~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李先達), 이병기(李炳基)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 15리) 남방에서 이병기와 함께 체포되어 총살됐다.

△ <b>이병기(李炳基 ~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 인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李先達), 이로침(李魯浸) 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 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15리) 남방에서 이로침과 함께 체포돼 총살됐다.

△ <b>김백룡(金白龍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입석리)</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황방우(黃方右), 최무용(崔武用), 정파총(鄭把&#24803;) 등 100여명의 의병과 함께 경북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金泉)수비대에 의해 황방우와 함께 체포돼 성주군(星州郡)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 <b>황방우(黃方右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수오리)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김백룡(金白龍) 등 100여명과 함께 경북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星州郡)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김백룡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 <b>최무용(崔武用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정파총(鄭把&#24803;)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북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정파총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리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 <b>정파총(鄭把&#24803;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신촌)</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최무용(崔武用) 형제 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북 개녕과 성주·김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최무용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리(旺里)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 <b>최일진(崔一進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b> 의병장은 1907년부터 동생 최무용, 정파총 등과 함께 경북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체포돼 12월  11일 김천에서 총살됐다.

△ <b>박부장(朴部將 ~1908. 4. 3·경북 성주 거구리)</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북 성주 등지에서 박봉래(朴鳳來) 의병장 등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 3일 박부장은 지례(知禮 지금의 금릉金陵) 남방 약30리 지점인 평촌(平村)·지소(평촌 동방 약5리)·거구리(巨句里)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과 활동하고 있던 중 4월 3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하다 최지(崔地)등 13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 <b>김성칠(金成七 ~1907. 12. 19·경북 봉화군 황엽령)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봉화군 일대에서 채모(蔡某) 의병장과 함께 의병 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9일 일본군 수비대와 황엽령(黃葉領) 백산 서방에서 교전을 벌이다 채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 31명이 전사하고 김성칠은 체포돼 총살됐다.

◇ 전남 8명
△ <b>손학곤(孫學坤 ~1908. 4. 29·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지역인 곡성·구례·광양·하동·남원을 중심으로 소광선(蘇光先) 의병장과 함께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8일 무렵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남 곡성군 동계리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는 4월 29일 일본군 숙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머리가 박살나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 <b>이정섭(李丁燮 ~1908. 11. 7·전남 함평군 식지면)</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그의 부친 이남규(李南奎)와 함께 기삼연 의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7일 그의 부친 이남규(기삼연의 후군장)와 전주 남문밖에 살고 있던 이내구(李內逑)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돼 3명 모두 총살됐다.

△ <b>김권석(金權石 ~1908. 7. 7·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범계리 천평)</b>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곡성·남원·하동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 7일 전남 구례(지금의 곡성군) 천평(川坪·구례 서남방 약 50리)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김권석을 비롯한 4명이 전사했다.

△<b> 김학삼(金學三 ~1908. 6. 14·전남 구례군 구례읍 독자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전남 구례에서 신모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약하며 일제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 14일 김학삼은 의병 30명과 함께 구례군 독자동(讀子洞)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김학삼을 비롯한 9명이 전사했다.

△ <b>최상광(崔相光 ~1908. 6. 14·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리 )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곡성·광양·하동·남원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최상광은 1908년 6월 14일 전남 구례군 상사리(上沙里·구례 동북방 약 10리)에서 의병 2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최상광을 비롯한 6명이 전사했다.

△ <b>김례중(金禮中 ~1908. 4. 7·전남 나주 월명동)</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김례중은 1908년 4월 7일 나주 서방 약 20리 월명동(月明洞)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됐다.

△ <b>김옥내(金玉內 ~1908. 4. 26·전남 곡성군 죽곡면 유봉리 비봉)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곡성·구례·광양·하동·남원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6일 전남 곡성군 죽곡면 비봉리 (飛鳳里)에서 일본군 북부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됐다.

△ <b>김문삼(金文三 ~1908. 12. 5·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년부터 조규하(趙圭夏) 의병장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조쥬하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해 김문삼은 의병장이 돼 광주·순천·곡성·구례·하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908년 12월 5일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谷城郡 竹谷面 泰安寺)에서 휘하의병 4명과 체포됐다. 이후  본군은 김문삼과 의병 1명을 총살했다.

◇ 전북 5명
△ <b>김진명(金辰明·44세, 1863~1907. 12. 1·전북 진안군 진안읍)</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전북 진안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0월19일 진안 결찰서와 우체국 등을 습격했다. 이후 그는 12월 1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참수(斬首·목이 잘려) 순국했다.

△<b> 박재근(朴在根 ~1907. 12. 28·전북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백암)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의병100여명을 규합, 전북 장수·무주·남원 등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27일 장수남방 약50리 백암(百巖)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는 28일 일본군의 모진 고문 끝에 칼에 찔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b> 이내구(李內逑 ~1908. 11. 7·전북 전주 남문 외) </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기삼연 의진에서 이남규(李南奎)와 이정섭(李丁燮) 등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7일 이남규, 이정섭과 함께 체포돼 3명 모두 총살됐다.

△ <b>마중길(馬中吉 ~1908. 5. 16·전북 무주군 무풍면 흑석 全北)</b>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무풍장(茂豊場) 등지에서 의병장 이장춘(李長春) 등 30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16일 무풍장 북방 천오백미터 흑석(黑石)에서 마중길 의병진 30여명은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장 이장춘, 포장(砲將) 정원준(鄭元俊), 교련관 마중길(馬中吉), 후군장 권병이(權秉貳), 중군장 신모(愼某)외 11명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가 됐다.

△ <b>안내성(安乃成 ~1909. 1. 16·전북 재동 계수역)</b>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항전했다. 그러던 중 안내성은 1909년 1월 16일 의병 30여명과 함께 계수역(契樹驛) 북방 약 20리 부근인 재동(在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동지 5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b>[인터뷰]독립운동가 발굴·선양 외길 인생 21년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b>

  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망언 등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로의 부활이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항일투사 259명 학살문건 발굴과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한 향토사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정재상(48·악양면)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이다.

  그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지리산 독립군 200명 발굴, 전남·광주 3·1독립운동가 48명 발굴, 영·호남 항일투사 70명 발굴, 경남일보에 지리산 항일투사 2년간 연재, 하동의 독립운동사 발간, 지리산 항일투사 335인 기념탑 건립, 무명항일투사 30인 의총비 건립, 독립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EBS다큐멘터리 ‘독백’ 제작방송, KTV스페셜 ‘이름 없는 독립전사를 찾아서’를 제작방송 등 그동안 독립 운동가를 위해 쉼 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최근에는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의 문건을 발굴·공개하고 ‘지리산 항일투쟁영웅 류명국·양문칠’ 전사를 발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항일투사 259명의 학살문건’을 찾아 신원이 확인된 41명의 의병장을 정부에 서훈신청(2014년 2월 4일 진주보훈지청을 통해)했다. 지금까지 그의 노력으로 10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았다. <본보>는 3·1절을 앞두고 그를 특별 인터뷰했다. 정 위원장이 걸어온 21년의 여정을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됐나?
△대학을 졸업(1992년)하고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면서 1993년 지역 주간신문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해 광복절을 맞아 특집으로 지역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돼 총살당한 박매지(박인환) 의병장의 기록을 하동군사를 통해 알게 됐죠.
  그런데 군사에는 박매지 의병장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에 불과했습니다. 기록에는 ‘일본군에 체포돼 귀순의 권유에 불복하다 총살됐다’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했고 이 내용만 가지고서는 어떤 기사도 쓸 수 없었죠.
  그래서 고민 끝에 이분의 당시기록물부터 수집하는 게 순서라 생각돼 백방으로 뛰어 다니며 기록물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신문에서 박매지 의병장과 함께 활약하다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9년간 복역한 함양출신 권석도 의병장의 항일기록을 찾게 됐었습니다.
  나는 이때 아 이제 뭔가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때부터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는데 빠져 들었고 언제 부터인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당시 내 머리 속에는 오직 ‘박매지’ 그 이름 석자만 맴돌았죠. 마음은 벌써 함양으로 달려갔습니다.
  다음날 나는 함양의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를 찾았고 여기서 당시 권석도 의병장의 기록을 찾아 서훈을 신청했던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됐습니다. 나는 그분이 함양에 계신 분 인줄 알았는데 서울사람이었죠.
  나는 미리 그분의 신상을 파악한 후 어느 해 겨울 서울로 찾아 올라갔습니다. 그때 사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해서 먼저 서울에 있는 고향선배인 이경규(박희태 국회의원 보좌관) 씨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당시 이경규 선배는 여러 가지 일로 무척 바쁜 중이었는데 만사 제쳐두고 고향후배가 올라왔다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때 정말 너무도 고마웠죠. 지금도 늘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리 서울 올라오기 전에 약속한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 정준영 선생을 이경규 선배와 함께 만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정준영 선생은 저와 함께 직접 국가기록원을 찾아 박매지 의병장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됐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박매지 의병장은 그 후 몇 년 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최근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과 이번에 259명의 학살문건을 발굴했는데 어떻게 찾게 됐나?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는 의병장들의 문집류와 국가기록원, 대학도서관, 문화원, 읍면사무소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합니다.
  이번 문건은 국가기록원자료인 폭도에 관한 편책과 LH토지주택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중일지(일본군 보병이 작성)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편집한 조선폭도 토벌지 등에서 찾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폭도에 관한 편책과 조선폭도 토벌지, 진중일지는 어떤 기록물입니까?
  △한마디로 의병을 탄압한 일본 측의 자료입니다. 폭도에 관한 편책은 총 121책의 방대한 양으로 의병에 관한 보고서를 월별로 경무국에서 편책한 일본 측의 의병탄압 일지입니다. 현재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각기 소장돼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폭도 토벌지는 1913년 조선 주차군사령부가 편집한 자료입니다.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영·호남지역 의병학살에 참여한 일본군 보병 12사단 14연대에서 작성한 것으로, 총14권으로 돼 있으며 1907년 7월 23일부터 1909년 6월 19일까지 2년간의 기록입니다. 2010년 최근에 입수된 자료입니다.

  -항일투사 117인과 259인 학살문건에 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은 한말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1909년 말까지 지리산일대인 하동, 산청, 함양, 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치르다 일본군의 지리산 대 토벌 작전 때 전사한 무명 항일투사입니다.
  이분들은 경남창의대 소속으로 산청출신 박동의 대장과 경북 영천출신 이학로 의병장, 류명국·양문칠 의병진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인은 강원도 출신부터 영호남 출신의병장으로 이분들도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 때 일본군에 체포돼 희생된 분들입니다.

  -이중에 공적이 가장 뛰어난 분을 한두 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항일투사들의 나라사랑정신과 민족애를 생각하면 이분들의 공훈의 높낮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경남 하동의 정승유 의병장과 전남 곡성의 손학곤 의병장, 전북 장수출신의 박재근 의병장을 들 수 있습니다.
  하동출신 정승유 의병장은 휘하의병100여명과 함께 지리산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결사항전하다 1908년 7월 초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그는 하동경찰서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동지들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또 다시 체포돼 일본군에 총살당했습니다.
  전남 곡성의 손학곤 의병장 또한 150여명의 의병대를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으나 1908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그는 체포된 후 모진고문을 당한 후 머리가 박살나 처참하게 순국했습니다.
  전북 장수의 박재근 의병장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을 펼치다 1907년 12월 체포됐습니다. 그는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일본군의 칼에 찔려 잔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말 이분들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확인할 때 제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이분들의 공적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동안 많은 독립운동가를 찾은 것으로 아는데 지금까지 몇 명이나 찾고 몇 분이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나?
  △아마 500명이 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포장을 받은 분은 100여명쯤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힘들었던 일은?
  △그동안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사들을 많이 발굴하고 많은 분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정작 경남에서 제일 높은 경남 창의대장인 박동의 의병장은 2010년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기록을 찾기 위해 수년간 곳곳을 뛰어다녔으나 허사였습니다. 산청출신 경남창이대장을 산청에 가서 물어봐도 아는 분이 없었으니 그분의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요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죠.
  그러던 중 2007년 국가기록원에서 박동의 의병장의 체후관련 문건을 찾았습니다. 이때 정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분의 최후 기록을 찾았으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기록에는 ‘박동의를 1908년 10월 17일 산청군 덕산에서 체포해 목을 베어 죽였다’고 했습니다. 정말 몸서리 처지는 일 아닙니까? 경남 창의대장의 최후는 일제에 의해 이렇게 잔혹하게 끝났습니다.
  이런 분이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묻혀 있었고 이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로만 광복, 말로만 순국선열을 부르짖었으니 참으로 한심하죠.
  제가 그해 자료를 정리해서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깜깜무소식. 3년이 지난 후 2011년에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정만 긴 세월이었죠.
  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는 광복이후 무려 66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겁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력 순위 15위입니다. 이제 국민들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유가족에게 국가가 보훈해야할 때입니다.

  -독립유공자 발굴 외에도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아는데 좀 소개해 주신다면.
  △지리산 항일투사기념탑을 하동군 악양면에 2008년 건립했습니다. 이 기념탑에는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전사 순국한 대표적 항일의병장 335인과 무명항일투사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시 제가 기념사업회장을 맞아 일을 추진했는데 지리산 인근 영호남 지역 17개 시군민이 참여해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 의신에서 순국한 무명항일투사 30인 의총비를 하동군의 도움으로 2011년 세웠습니다.
  2004년에는 독립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EBS 다큐멘터리 ‘독백’을 제작방송했고, 2007년에는 KTV스페셜 ‘이름 없는 독립전사를 찾아서’를 제작, 현충일과 광복절에 각각 방송했습니다.
  그밖에 경남일보에 지리산 항일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기획특집 ‘정재상이 전하는 지리산의 독립운동’을 2007년과 2008년 2년간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2000년에는 ‘하동의 독립운동사’를 발간했고 최근에는 ‘지리산 항일영웅 류명국·양문칠 장군’의 전사를 발간했습니다.
  지금은 ‘지리산 항일투쟁사’를 집필 중이며, 류명국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류명국 의병장 공훈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독립운동가 발굴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많은 경비가 소요됐을 텐데 어떻게 마련했나?
  △경비보다는 오히려 노력이 많이 들었다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가 발굴을 하면서 오직 나의 사명감으로 이일을 해 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남을 위해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힘이 미칠 때 까지는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념탑 및 비 건립, 책 발간 등은 지역의 선후배와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아 추진했습니다.

  -가족들의 불만은 없었는가?
  △이 일을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일이라서 그런지 제 집사람과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서로 자긍심과 보람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일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양봉을 하고 있습니다. 벌을 키우고 있죠. 꽃따라 철따라 봄이 되면 경남 사천에서 경기도 안성, 강원도 철원까지 대한민국을 1년에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큰 수입은 안 되지만 먹고는 삽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지리산 항일투쟁사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내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책이 출간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연구 등의 공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상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정말 제가 한일에 비하면 너무도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2007년에는 국가보훈문화상과 향토문화상을 받았고, 2011년에 하동군 군민상 등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노력 하라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망언을 일삼을 때 정말 분노를 느끼고 온몸에 핏대가 섭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정신 바짝 차려야지요. 그리고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를 위해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보훈해야 합니다. 누가 이 땅을 지켰습니까? 누가 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까?
  순국 선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토록 잘하는 강국이 됐겠습니까? 이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유족에게 국민 모두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젠 우리가 그분들에게 보답할 때입니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ue, 25 Feb 2014 11:02:48 GMT</pubDate>
</item>
<item>
<title>소녀상 테러는 친일적 전쟁 찬미행위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6158887356289020</link>
<description><![CDATA[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22일 논평을 통해 거듭된 소녀상에 대한 테러와 친일적 전쟁찬미 행위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시민모임은 논평에서 “일본군‘위안부’소녀상(평화비)를 매춘부로 합성한 사진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있다” 며 “우리 국민들 중에서 친일적 성향을 가지고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재차 모독하는 사람들을 처벌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일본군‘위안부’소녀상을 매춘부로 합성하거나 말뚝테러와 태극기에 파리를 합성한 사진이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친일성향의 카페를 통해 유포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하 논평>

<b>[논평]소녀상에 대한 거듭된 테러, 친일적 전쟁 찬미 행위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b>
 
일본군‘위안부’소녀상(평화비)을 매춘부로 합성한 사진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있다. 비단 이번뿐 아니라 이른바 말뚝테러와 태극기에 파리를 합성한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친일성향카페를 통해 유포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경악하게 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이미 국제적으로 전쟁 중에 일어난 가장 잔혹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전쟁범죄로 인식되어지고 있고 수많은 국가가 일본정부에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우익성향의 일본정치인들은 물론 개인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피상적인 모습일 뿐, 본질은 그들이 일으킴 그 전쟁을 정당하다거나 찬미하는 것이고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에 다름없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는 전쟁을 찬미하는 범죄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여 전쟁을 찬양하는 발언이나 활동을 하는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2월 대만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 참석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본의 시민단체들에게 일본 내에서 이런 법률을 제정하는 활동을 제안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물론 일본에서 전쟁을 찬양하거나 피해자들을 모독하는 행위와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된다면 참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피해국에서 조차 하지 못한 일을 일본의 시민단체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피해국에서 먼저 이러한 노력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발언한 적이 있다.

사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아시아 각국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11년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 노력을 진행하지 않은 한국정부의 책임을 물은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최근 국가인권위에서 한국정부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하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한발만 더 나아갔으면 한다. 우리 국민들 중에서 친일적 성향을 가지고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재차 모독하는 사람들을 처벌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국가와 국민들이 당신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려고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드리는 것으로, 아주 시급한, 최소한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Sat, 23 Feb 2013 12:07:5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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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쉬어가기] 도떼기시장의 어원과 거제도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5573371555292020</link>
<description><![CDATA[도떼기시장의 어원이 거제도와 관련이 있다(?).

<도떼기시장>이란 정상적인 시장이 아닌 일정한 곳에서, 재고품·중고품·고물 따위 온갖 상품의 도산매·방매·비밀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도떼기시장에 대한 어원과 설은 많다. 사전적 해석에서부터 시대적 상황에 따라 풀이하기도 한다.

사전적 접근방식은 ‘도’는 한자 ‘都’로, ‘모두’라는 뜻과 ‘떼다’의 명사형 ‘떼기’를 붙혀 도떼기가 된다는 설명이다.  

‘장사를 하려고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사다’ 라는 설도 있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 경매에서 낙찰받았을때 말하는 ‘돗따’의 파생어라는 설이 있다.

도떼기시장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장은 부산의 국제시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후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해 1948년 자유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국제시장이란 명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되었고 이들 밀수입 상품들은 이곳을 통해 전국 주요시장으로 공급되면서 불리워졌다.

부산중구청은 국제시장 장터를 ‘돗대기시장’ 혹은 ‘돗떼기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이유를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물건 등 없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데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도떼기시장은 자유시장이 한국전쟁 이후 국제시장으로 자리잡기 전 과도기에 붙은 이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 도떼기시장의 유래가 됐을 법한 기록이 <거제시지>에 남아 있다.

시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12월 1일부터 한국군과 유엔군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북한 전역에 피난령을 공포했다. 

12월 4일 평양철수에 따른 피난민은 한국군의 보호아래 육로로 남하시켜 대구·부산등지에 집결했고, 청진·흥남·함흥 등 동해안의 피난민은 어선을 이용하거나 미리준비한 ‘L S T’ 수송선으로 남하시켜 제주도와 거제도로 집결시켰다. 

12월 25일 오후 1시 거제도에 수송 배치된 10여 만명의 이북피난민을 실은 ‘L S T’ 는 장승포항에 도착하자, 거제도 시국대책위원회의 주선으로 각 읍·면에 분산 배치했다. 

거제도는 인구 10만5천명으로 반농반어의 평화로운 고장이었는데, 돌연히 10여 만명의 이북피난민을 받았고, 11월 27일에는 유엔군 거제도포로수용소가 설치됨에 따라 1951년 3월 5일에는 유엔의 구호기관인 CAC 거제도팀이 신설되고, 사회부 거제도 분실, 그리고 통영군 거제도분소가 설치됨으로서 거제도는 한국전쟁의 후방기지가 됐다.

그 후 수많은 북한 피난민이 거제도에 거주하게 되자 포로수용소 주변에는 일명 돗데기(돗드준장)시장이 형성됐고… 라는 기록이 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북한 피난민이 거제도에 거주하게 됐고 포로수용소 주변에 무질서하게 난전이 형성되자 돗드 준장이 장사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구역을 정해 주었는데 이 거리를 상인들은 ‘돗드시장’ 이라 불렀고 자연스럽게 도떼기가 됐다는 설이다.

이 도떼기시장은 처음에는 포로수용소 주변에 있다가 장승포항구가 있는 신부시장으로 옮겨갔다는 설도 있다.

이후 피난민들은 거제를 떠나 주로 부산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억지일 수는 있지만 도떼기시장은 돗드 준장이 정해준 거리시장이라는 말에서 변형되었으며 부산 자유시장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거제에 있는 돗드시장처럼 북적거린다고 해서 도떼기시장이라고 불렀을 지도 모른다. 믿거나 말거나.

<서용찬 기자>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17 Dec 2012 17:41:5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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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에서 비운의 왕 고려 의종왕 추념식</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5210314954517020</link>
<description><![CDATA[거제에서 고려왕을 추모하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거제 지역의 문화단체인 거제수목문화클럽(회장 김현길)이 주최하고 거제시가 후원하는 ‘제5회 고려 제18대 의종왕 추념식’ 이 4일 둔덕면 복지회관에서 열렸다.

이 추념식은 국가 사적 제509호 거제둔덕기성에서 개최될 계획이었으나 비가 내려 변경됐다. 

추모제는 의종왕을 추모하는 ‘거제의종폐왕무 - 귀향’ 에 이어, 추념사, 추모사, 조문낭독, 헌시낭송, 헌화분향, ‘거제의종폐왕무- 천제단의 빛’ 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의종왕은 1146년 고려 제18대 왕에 즉위 24년간 재위하다 1170년 정중부&#8228;이의방 등 무신정변(정중부의 난)때 물러나 기성현(거제현)으로 피신왔다. 

의종은 3년 동안 거제 둔덕 일대에서 머무르다 계림(현재 경주)까지 나아가 복위를 꿈꾸다 이의민에게 비참하게 살해돼 곤원사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가 1173년 10월 1일 향년 47세였다.

경주에서 의종왕이 승하한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둔덕 백성들은 무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섣달 그믐날 제물을 차려 의종왕을 추모하는 제사를 800여 년 동안이나 이어왔다. 

추모제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가정의례준칙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거제수목문화클럽 회원들이 비운의 왕 의종의 명복을 비는 추념식은 을 개최하게 된 것은 비록 권력을 잃은 왕이었지만 왕을 비롯한 왕족이 둔덕면 일대에서 3년간 머무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8년부터 올해까지 5회째 의종왕 추념식을 개최해 오고 있다. 

거제수목문화클럽은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승하한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가져와 가묘를 조성한 부여군의 사례와 조선시대 강원도 영월로 유배 후 수양 숙부에 게 죽임을 당한 단종 임금에 대해 영월군에서 단종제로 부활시킨 사례 등을 통해, 단순하게 지내고 있는 추념식을 앞으로 의종왕 추모제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둔덕(屯德)의 덕(德)은 왕을 뜻하며 둔(屯)은 머무르다 의미를 담은 지명이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Mon, 05 Nov 2012 17:12:2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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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동토의 땅 사할린 … 한국인을 만나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4854920453726020</link>
<description><![CDATA[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후 사할린 한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일본은 패망과 동시에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고, 러시아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인들의 귀환을 모두 거부했다.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은 “조선노동자” 라는 최초의 한인신문과 조선인 학교 등을 만들고, 한국어방송을 하는 등 해방 후 러시아 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고수해왔다. 

<사할린 한인, 동토에서 찾은 통한의 기록>전은 해방 후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한인정책 관련 정부기록, 그리고 해방직후 사할린 한인들의 생활모습 관련 기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사할린에 살던 이광자라는 고려인 여학생이 있다. 

그녀는 기술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북한 국적이었기에 이동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거절당한 끝에 그녀의 아버지는 총영사에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 사연은 1966년 소련의 한 외교기관에 공문서로 남았다.
#그림1중앙#
이처럼 머나먼 사할린 땅에서 살아가던 한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기록들이 거제에 온다. 

해금강테마박물관(관장 유천업·경명자)은 오는 10월 5일부터 ‘국가기록원과 함께하는 <사할린 한인, 동토에서 찾은 통한의 기록>’전을 유경갤러리Ⅱ에서 연다고 밝혔다. 

이번에 전시될 사진과 기록 자료들은 사할린 한인이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귀한 기록물로, 일제강점기 사할린 한인들에서부터 해방과 사할린 한인들의 삶과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의 꿈”을 다룬 귀중한 자료들로 국가기록원이 수집하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해 화제를 모은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토의 땅 사할린 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편지, 그리고 일제와 소련에 의한 고려인의 수난을 보여주는 문서 등이 공개된다. 
#그림2중앙#
유천업 관장은 “국가기록원의 좋은 전시를 지방에서도 향유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마련했다”면서, “이번 전시가 사할린 한인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가기록원이 주최하고 해금강테마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해금강테마박물관 유경갤러리Ⅱ에서 오는 10월 5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ue, 25 Sep 2012 14:00:04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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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제야 빛을 보는 ‘거제의 유배문학’</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4252406752044020</link>
<description><![CDATA[<P align=justify><FONT face=Gulim>거제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씨. 그의 10여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까. 17일 거제시 공공청사에서 ‘거제유배문학의 이해’란 주제로 2시간여 동안 그의 열띤 강연이 있었다.<BR><BR>변방에만 머물던 거제에 이렇게 주옥같은 시를 발굴, 세상에 드러낸 그는 행정의 지원없이 일개 민간 연구가가 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BR><BR>거제도 유배자들이 전한 한시 760여 편과 토착민과 관료들이 거제의 자연을 노래한 시 125편, 기생 및 한글문학 10여 편 등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BR><BR>#그림1중앙#<BR>고영화씨는 “거제로 유배 온 유배자는 현재까지 500여 명의 명단이 발굴되었으나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주요 사건의 주동자만 실록이나 일성록 등에 기록돼 있다. 연좌된 자들은 물론이고 형사 잡범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혔다.<BR><BR>그가 밝힌 거제도 대표 유배 문학인으로는 정서, 이행, 홍언충, 최숙생, 정황, 김진규, 조병현, 심광세, 홍무적, 이윤, 김세필, 송시열, 김창집 등이 있다. 이 중 이행&#8231;정황&#8231;김진규&#8231;송시열을 거제 4대 유배 문학인으로 꼽았다.<BR><BR>유배작품은 널리 알려진 대로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거제민의 실상과 풍경을 노래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배작품은 760여 편에 이른다.<BR><BR>고씨는 “유배문학은 개인과 시대적 정신이 절실히 반영된 것으로 시대&#8231;정치적 갈등속에서 정치밖으로 밀려나 현실복귀를 꿈꾸는 그들의 사상과 염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하면서 생성된 것”이라고 말한다.<BR><BR>그는 “거제가 대표적 유배지가 된 것은 고려시대 때다. 당시 가장 멀리 있던 거제로 유배를 보내던 것이 1912년까지 이어져 왔다. 800년간 이어온 유배자들은 죽거나 풀려날 때까지 자기 땅에서 쫓겨난 슬픈 이방인었다”고 말했다.<BR><BR>이어 “한편으로 거제인들에게는 당대 최고 지식인들로부터 문화와 사상, 정신을 직접 배워 낙후된 거제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촉매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BR><BR>척박한 거제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학자들. 그들은 그 전에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동생이었고 스승이었다. 유배작품을 통해 치열하게 살아간 그들의 삶도 우리 거제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BR><BR><FONT color=#cc0000><STRONG>거제의 대표적 유배자와 문학</STRONG></FONT><BR><BR>고려시대 정서는 1157년 의종 11년 2월 동래에서 거제도 사등면 ‘오양역’으로 이배돼 1170년 정중부의 난 이후 복권됐다.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인 ‘정과정곡’을 여기 거제도에서 암담한 귀양살이를 겪으며 지었다.<BR><BR>또 한사람 정황은 1560년 49세로 사망할때까지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거제 유배자 중 교육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도 정황이다. 당시 경남 전 지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와 거제향교가 최고의 부흥기를 맞기도 했다.<BR><BR><FONT color=#3333ff><STRONG>-계룡산시</STRONG><BR>계룡산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고<BR>한껏 높은 산의 기세가 해가 뜨는 동쪽 하늘을 압도한다<BR>오아포는 예로부터 대장수를 두었다 하네<BR>오양역이 못쓰게 되어 여섯 해 동안 우선 작은 성을 쌓았고<BR>가라산 웅치고개 여기가 남녘의 땅이라<BR>먼 곳을 끌어당겨 익숙히보니 아홉 내(川)가 달리는게 분명하구나<BR>모자와 같은 북쪽에 두 개의 섬이 있는데<BR>얼굴을 아무리 그대로 유지할래도 거품같이 차차 쇠하여 늙어가고<BR>땔감나무와 밥을 지어 끝내니 인간세상 신선같이 상서롭구나<BR>어느새 한해를 보내면서 슬슬 돌아다녀도<BR>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이런 몸이 가엾지 않는가<BR>높은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어찌하여 잠시 업신여겨 보이는지<BR>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난다네<BR></FONT><BR>거제면 동상리에서 귀양살이를 한 김진규는 송시열의 제자로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주자학과 춘추대의를 기반으로 난마와 같은 정국속에서 그 대의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한다.<BR><BR>그는 그물을 쳐서 대구를 잡는 거제 어부들의 모습과 처음 먹어보는 대구 맛에 반해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님이 생각날 정도로 대구 맛이 훌륭했음을 시 한편에 담았다.<BR><BR><FONT color=#3333ff><STRONG>-대구를 먹으며 느끼는 바가 있어</STRONG><BR>큰 입에 가는 비늘은 세상에 보배인 바<BR>바다생선 중에 홀로 대단히 초륜하다<BR>어부들은 푸른 바다에서 힘써 그물을 쳐서 모아<BR>역관이 빨리 달리어 대궐에 올린다네<BR>예전엔 미천한 신하에게 늘 은혜로 하사했는데<BR>먼 변방에 정처 없이 떠돌다 이에 새로운 맛을 보는구나<BR>밥 먹다 다시금 고향집 문이 그리워지네<BR>서글퍼라, 이유 없이 늙으신 어르신만 남는구나<BR><BR><STRONG>-밤의 경치</STRONG><BR>달을 토해내는 가벼운 구름<BR>꽃나무는 맑은 안개 속에 잠긴다<BR>밤이 깊어 고요한 외딴 마을<BR>맑은 샘물소리 대숲을 울리네<BR></FONT><BR>밤의 경치를 읊은 서경시이다. 외딴 거제면 동상리 골짜기의 적막감에 낮에는 잘 들리지 않던 죽천(반곡서원 서쪽에 있는 샘물) 샘물 소리까지도 청아하게 들린다. 거제도의 밤늦은 풍경이라 그런지 더 정겹다.<BR><BR><FONT color=#3333ff><STRONG>-거제도 어촌 / 이유원<BR></STRONG>물구름 돌 기운이 발 위에 서늘하고<BR>옛 먹을 가벼이 때리니 책상에 향기 가득하다<BR>오얏 꽃 마을에 보슬비 내리는데<BR>시인에게 이끌려 낮잠만 길어지네<BR><BR><STRONG>-거제도 귀양살이 / 송시열<BR></STRONG>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BR>고야선인도 불러 올 것만 같아<BR>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BR>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BR></FONT><BR><FONT color=#cc0000><STRONG>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STRONG></FONT><BR><BR>거제가 배출한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동록 정혼성은 한시(漢詩)로 문집을 남긴 사람으로 거제도 토박이로서는 유일하다. 거제면 반곡서원 안에 동록당에 안치돼 있으며 매년 춘삼월 첫 정일에 유림들이 반곡서원 우암사(송시열)와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BR><BR>1779년에 출생했으나 죽은 연대는 알 길이 없다. 그는 한 평생 은사로 살면서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고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은 대부분 초서와 해서로 글씨체가 아름답고 유순하며 지나침이 없던 그의 삶과 닮아 있다.<BR><BR>당시 동록은 일생동안 오로지 학문을 좋아해 깊은 숲과 계곡(계룡산과 선자산 일대)에 파묻혀 이 세상에서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던 추사 김정희가 ‘동록문집’을 읽고 감탄해 7언절구 시 한편 남겼다고 전해진다.<BR><BR>또한 중국인 심평향도 동록의 시와 글씨를 보고 피와 생활이 모두 군자라고 칭송했다. 동록 정훈성은 거제의 유림이나 사회에서 정군자(鄭君子)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에 대한 많은 설화도 전해져 오고 있다.<BR><BR>동록의 철학은 노자의 무위자연(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상과 퇴계 이황의 윤리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주리설(主理設)에 바탕을 두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말을 남겼다.<BR><BR><FONT color=#3333ff>莫結脫막결탁-맺고 풀지 말라(속박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라)<BR>中虛基心중허기심-늘 한 가운데 자리 할 때 그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라<BR>道消化陰陽도소화음양-세상의 이치는 음양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BR></FONT><BR>동록 정훈성은 거제면 명진리에서 살았으며 그가 제자를 가르친 곳은 거제면 녹동, 사슴골이란 곳이며 거제뿐 아니라 인근 통영 고성출신의 제자들도 많았다. <BR><BR><STRONG><FONT color=#cc0000>조선시대 거제 한글 작품</FONT></STRONG><BR><BR><FONT color=#3333ff><STRONG>-거제기녀 ‘가향’을 생각하며</STRONG> <BR>오니예 천연한 꼿치 연꼿 밧긔 뉘 잇느냐<BR>하추예 네 날 쥴을 나는 일즉 몰낫노라<BR>지금의 떠나는 정이야 엇지 그지 잇스리<BR></FONT><BR>작가는 아마도 거제고을의 관리였거나 유배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소 문맥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고 또한 오니, 하추 등의 한자어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미루어 거제에 잠시 머문 장사치일 가능성이 크다.<BR><BR>거제기녀 가향을 진흙탕에서 핀 연꽃에다 비유하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귀다. 즉석에서 지은 글임에도 가향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거제도 고전문학에 있어 한글로 지은 멋진 작품임에 틀림없다. 가향은 가무는 못하나 얼굴이 아주 예뻤으며 당시 18세였다고 전한다.<BR><BR><FONT color=#3333ff><STRONG>-처녀의 향수<BR></STRONG>서울이라 유처녀가 거제 음재 귀양 와서<BR>대구야 청청 일년이야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BR>나도 언제 평화로저서 구름같이 떠나갈까<BR></FONT><BR>거제도는 귀양지다. 서울에서 귀양 온 선비가 딸을 데리고 거제 읍내에 와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귀양이 언제나 풀릴까 하고 먼 북녘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처녀가 구름을 타고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노래다.<BR><BR><BR>거제도는 어느 지역보다도 발전된 산업과 뛰어난 풍광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제는 문화가 있는, 이야기가 있는 고장을 만들고 발굴해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거제를 물려줘야 한다. 모든 스토리텔링은 역사문화의 두께와 비례해 귀결되기 때문이다. <BR><BR>거제고전문학 작품은 관리나 거제선비, 학자 등이 지은 한문학과 한글작품이 120여 편에 이르며, 거제유배문학 작품은 760여 편이 발굴돼 있다. 또한 거제도 전승 민요는 총 417편, 구전설화는 약 250여 편이 있다. <BR><BR>역사에서 항상 ‘변방’으로만 기록된 거제의 역사를 되찾고 이 땅과 바다에서 몸 부대끼며 살아 온 거제인의 자부심을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거제 산천 곳곳에 녹아든 거제인의 삶, 이제 그 속살들을 들춰내야 한다.<BR></P></FONT>]]></description>
<author>윤광룡 기자</author>
<pubDate>Tue, 17 Jul 2012 20:21:07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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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인’은 우락부락 ‘뱃놈’이 아니었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4251867152043020</link>
<description><![CDATA[<P align=justify><FONT face=Gulim><FONT color=#cc0000><STRONG>권력의 뒤안길서 꽃핀 ‘유배문학’ 거제를 빛내다<BR></STRONG></FONT><BR>예전에 ‘거제’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뱃놈’ ‘섬놈’ ‘쎈놈’ ‘거친놈’ 등이다. 이웃 통영의 양반(?)들은 거제쪽 방향을 향해 오줌도 안 눈다는 말이 있다. 그네들이 ‘섬놈’ ‘뱃놈’이라고 싸잡아 낮춰 보던 시선을 이제 거둘때가 됐다. <BR><BR>유구한 역사이래 ‘거제’ 만큼 들고 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거제 산천 곳곳에 녹아들어 이제 그 찬란한 문화적 혁명(?)을 이룰때가 된 것이다. 이제 그 속살들을 들춰내는 일만 남았다.<BR><BR>‘유배지’ 하면 거제가 떠 오른다. 왕권 다툼에서 밀려난 왕족들, 붕당 다툼으로 인해 유배와 해배를 거듭한 관료들, 선대의 죄로 인해 길고 긴 유배살이를 하게 된 왕족과 양반들, 그들은 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BR><BR>거제를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거제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씨는 “거제는 역사문학의 보고다. 반곡서원 일대 유배지 조성, 문동폭포 일대 고전문학지 조성, 거제면 일대 사직단 조성, 거제 유배길 코스 발굴 등 거제의 역사와 문학을 이용한 관광상품화는 지천에 널렸다”고 말한다.<BR><BR><FONT color=#cc0000><STRONG>거제, 유배문화 컨텐츠 개발로 ‘역사의 고장’ 탈바꿈<BR></STRONG></FONT><BR>유배는 단순한 형벌 제도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유배는 정치적 도구로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는데, 유배를 가기까지의 과정에서부터 유배형의 수준, 풀려나는 시기, 이후의 생활까지 모두 그때의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됐다. <BR><BR>#그림1중앙#<BR>조선왕조실록에는 유배 관련 내용이 5860여건 나온다. 이 가운데 빈도수가 많은 유배지가 40여개이고 5위까지는 모두 섬이다. 빈도수에서 거제도가 제주도에 이어 2위지만 문헌상 유배자 수로는 거제가 500여명으로 최고로 많다.<BR><BR>고영화씨는 거제에서 유배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이유는 ‘거제도의 자주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회의감’과 ‘거제는 유배지라는 나쁜 이미지가 각인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한 몫을 했다고 지적했다.<BR><BR>고영화씨는 “고려시대 정서와 조선시대 정황은 거제에서 13년을 살았고 이 당시 거제로 유배 왔던 사람들이 최소 1000여명 이상이다. 그들과 ‘거제인’들이 함께 만들어 낸 문화가 바로 ‘거제 유배문화’”라고 밝혔다.<BR><BR>그는 “거제와 관련된 유배문학 자료는 1000페이지가 넘는다. 여기에다 거제고전문학도 140여 페이지에 달한다. 민요 설화 등을 합친다면 엄청난 양의 ‘거제문학의 자산’을 가질 수 있다. 고전사료에 상상력을 보태 현대에 맞게 재조명 한다면 ‘거제’는 새로운 컨텐츠로 각광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BR><BR><FONT color=#cc0000><STRONG>변방의 섬 거제, 이제 주체적인 정체성 되찾아야</STRONG></FONT><BR><BR>거제의 역사는 이 땅의 역사에서 항상 변방에 속했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섬과 바다’라는 공간 인식을 근간으로 예부터 ‘황폐한 땅’ ‘야만인들이 득실거리는 땅’으로 인식돼 왔다.<BR><BR>#그림2중앙#<BR>거제의 역사는 중앙의 역사서술에 따른 입맛에 따라 휘둘려 왔다. 고대로부터 해상교류의 거점로인 거제 남동부해안인 명진&#8231;송변&#8231;아주현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해적으로 둔갑시켜 800여명 이상을 합천과 진주 등지로 분산 거주시킨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BR><BR>정사의 기록은 당시 중앙 지배층의 편향된 인식의 산물이다. 그게 다 사실일 순 있어도 진실은 아니다. 어쩌면 민중의 이야기가 진실에 가까운지도 모를 일이다.<BR><BR>역사상 최다 유배자를 품었던 거제는 이들이 거제를 떠난 후 거제의 아름다운 경관과 뒤늦게 깨달은 거제인의 따뜻하고 깊은 심성을 잊지 못해 대부분 거제에 대한 연민과 찬사의 글을 남기게 된 것은 이러한 까닭일테다.<BR><BR><FONT color=#3333ff><STRONG>-계룡산 / 조익찬</STRONG> <BR>진귀한 계룡산 겹겹의 봉우리<BR>올라가 노닐다 날 저무니 오직 동쪽에 달만 떴구나<BR>앉은 바위에서 바라본 경치는 천년의 바다로다<BR>험한 길에 젖은 땀 만리 바람 불러 사라진다<BR><BR><STRONG>-판옥선을 타고 거제를 다니다가 / 이광윤</STRONG><BR>끝도 없는 바다 물결 허공에 잠겨 푸른데<BR>일백 장골이 먼 바람 끌어 당겨도 돛대가 위태하다<BR>고각의 한 소리로 푸른 기운 뚫고<BR>물고기와 용이 치켜들고 춤추니 해 저물 무렵이네<BR><BR>수많은 용이 머리 들고 바다 가운데 두둥실<BR>단풍과 국화는 서리 맞아 취하니 눈에 가득 가을일세<BR>오늘 밤 조각배를 어디에다 머물꼬<BR>머리털 하나로 산이 무성하니 여기가 아주땅이라지<BR><BR><STRONG>-화경 / 이행</STRONG><BR>무수한 이름 없는 꽃 저마다 피어있고<BR>산 오르는 작은 길은 짐짓 구부러져 있도다<BR>남은 꽃향기 봄바람 향해 쓸지 말아라<BR>혹 한가한 사람 술 가지고 올지도 모르니<BR></FONT><BR>예기 제통편에서 “선조에게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후손이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다.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라 했다. 중앙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거제의 사실’들이 정리될 때 주체적인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BR><BR>고영화씨는 거제역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지역역사 본연의 모습을 지역공동체를 통해 밝혀내야 한다. 거제역사의 탄력성과 다양성을 찾기 위해서는 ‘거제적인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가장 거제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BR></P></FONT>]]></description>
<author>윤광룡 기자</author>
<pubDate>Tue, 17 Jul 2012 18:51:11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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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리나라 고대 봉문축조술 비밀 풀렸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2990967847686020</link>
<description><![CDATA[△모닝뉴스&#12539;모닝뉴스아이
부산박물관(관장 양맹준)은 지난해 7월부터 실시한 연제구 연산동고분군(부산시 기념물 제2호)의 정비&#8228;복원을 위한 제2차 발굴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8228;부곽 수혈식석곽묘 및 고대 봉분축조기술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산동고분군은 삼국시대 부산지역 유일의 고총고분군으로 부산박물관에서는 2009년 12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실시한 1차 조사를 통해 이제까지 알려져 있던 10기의 고총고분 외에 6기를 추가로 확인한 바 있다. 이번 2차 조사를 통해서는 2기의 고분을 더 확인, 연산동고분군의 규모와 위상을 제고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M3호분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 전체 길이가 약 16m, 너비는 4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8228;부곽 수혈식석곽묘를 확인했다. 

또한 길이 25.2m, 높이 4m 이상의 거대한 봉분을 쌓는 방법으로, 봉분을 구획하여 작은 크기의 덩이흙(점토괴)을 차곡차곡 쌓는 고대 토목기술도 밝혀냈다. 무덤 내부와 봉토에서는 삼국시대 비늘갑옷편과 판갑옷편도 출토됐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오쿠라[小倉]컬렉션에도 연산동고분군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판갑옷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연산동고분군 축조집단의 무장(武將)적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부산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조사 성과를 통해 삼국시대 거대 고총고분의 축조기술을 복원하는 데 크게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제까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연산동고분군 축조집단의 성격은 물론 5세기~6세기의 부산지역 고대사 복원에도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편, 2월 27일 오후 3시 연제구 연산동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에서는 이번 발굴 성과를 설명하는 시민공개설명회가 개최된다.]]></description>
<author>김동규 기자</author>
<pubDate>Wed, 22 Feb 2012 20:21:18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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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제 폐왕성에서 고려 의종을 기억하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1960603842050020</link>
<description><![CDATA[거제에서 고려시대 왕을 추모하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거제 지역의 문화단체인 거제수목문화클럽(회장 김현길)에서 주최하고 거제시가 후원하는 '제4회 고려 제18대 의종왕 추념식'이 지난 22일 국가 사적 제509호 거제둔덕기성에서 개최(이번 추모식은 비 때문에 둔덕시골 농촌체험센타에서 진행)됐다.

의종왕을 추모하는 식전 공연 '해조 음이 흐르는 폐왕성'에 이어, 추념사, 헌시낭송, 조문낭독, 헌화분향, 의종의 원혼을 위로하는 &#985168;살풀이 춤&#985169;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의종왕은 1146년 고려 제18대 왕으로 즉위, 24년간 재위하다 1170년 정중부&#8228;이의방 등 무신들이 정변(정중부의 난)을 일으킴으로써 왕위에 물러나 기성현(거제현)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3년 동안 거제 둔덕 일대에서 머무르다 왕위 복위를 위해 계림(현재 경주)까지 나아갔으나 무신 정권이 보낸 장군 이의민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가 1173년 10월 1일이며, 향년 47세였다.

이렇게 비운에 간 의종왕의 명복을 비는 추념식을 개최하게 된 것은 비록 권력을 잃은 왕이었으나 왕을 비롯한 왕족이 거제시 둔덕면 일대에서 3년간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의종왕이 승하 하자 둔덕의 어진 백성들은 그 당시 집권 세력인 무신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800여 년 동안 섣달 그믐날 제물을 차려 의종왕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으나, 안타깝게도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과 가정의례준칙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제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단절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거제에 고려시대 왕이 3년간 거주했다는역사적 중요성을 이어가고 널리 알리기 위해 거제수목문화클럽 회원들이 지난2008년부터 올해까지 4회째 의종왕 추념식을 개최해 오고 있다. 

이와 함께 거제수목문화클럽에서는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승하한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가져와 가묘를 조성한 부여군의 사례와 조선시대 강원도 영월로 유배 후 수양 숙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단종을 영월군에서 단종제로 부활시킨 사례 등을 살펴, 추념식을 의종왕 추모제로 발전시키고 국가사적지인 거제둔덕기성(폐왕성) 일대를 고려촌으로 조성해 역사관광 문화자원으로 개발함에 있어 행정과 각계각층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다.

의종왕을 추모하는 백성들은 둔덕이라는 지명으로 의종왕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많은 덕을 베풀었다는 뜻을 후세에 길이길이 전하고 있다.  

둔덕(屯德)이라는 명칭은 덕(德)은 왕을 뜻하며 둔(屯)은 머무르다 는 뜻으로 의종왕이 둔덕에 주둔하였다는 자랑스러운 지명임을 전 동아대학교 총장 심봉근 박사는 2011년 8월 24일 ‘국가사적 제509호 거제둔덕기성의 이해와 고찰’이라는 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덕(德)이 왕을 뜻하는 예는 서울의 덕수궁(德壽宮)이 조선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뜻으로 명명되어진 사례에서도 알 수가 있다.

]]></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Wed, 26 Oct 2011 14:13:5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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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장군 남산봉수대 “봉수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됐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31644044740233020</link>
<description><![CDATA[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위치한 ‘남산 봉수대’가 현재까지 남한에서 확인된 봉수대 유적 중 만든 시기가 가장 오래됐고, 가장 큰 규모의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울산문화재연구원(원장 이겸주)은 기장군의 의뢰로 조선후기 때 흔적이 노출된 남산 봉수대에 대한 학술정비 차원의 발굴조사해 처음 만든 시기와 구조, 그리고 규모 등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해발 229m 산정에 위치한 남산봉수대는 바다를 조망하는 이곳에서 연기를 피우던 시설인 연소실, 연기를 올리는 시설인 연대(煙臺), 그리고 관련 부속 건물터 등이 드러났다. 또 애초 봉수대는 연대 일부(지름 7m, 높이 4.5m)만 노출된 상태였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방호벽 기준으로 지름 14m, 연대 높이 5m, 둘레 220m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현재까지 남한에서 발굴된 봉수대 중에는 가장 큰 것이라고 조사단은 밝혔다.

그리고 부속 건물터, 기단부와 벽체, 초석, 온돌시설 등이 지금까지의 봉수대 발굴조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양호한 보존 상태로 발견됐고, 고려시대 봉수대 부속 건물은 남한에서 확인된 예가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남산 봉수대가 언제 처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 존재가 조선 초기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1425)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에는 봉수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었으나, 하부 퇴적층에서 고려청자와 어골문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남산봉수대 역사가 적어도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description>
<author>윤우봉 기자</author>
<pubDate>Mon, 19 Sep 2011 22:54:07 GMT</pubDate>
</item>
<item>
<title>[신간]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29915114233313020</link>
<description><![CDATA[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전쟁으로 인한 외상성 신경증)를 주제로 쓰여진 학술서가 발간됐다.

한국 근 현대사 연구에 매달려온 전갑생씨가 새로운 자료를 통해 기존의 시각을 재해석한 다른시각으로 펴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 는 ‘선인’이 펴냈다.

 <b>전쟁 트라우마</b>
과거의 전쟁은 현재에도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미 정권은 전쟁이라는 유령을 부활시켜 긴장과 불안 그리고 트라우마(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자극하고 있다. 

<b>빨갱이―반공 트라우마 </b>
단어의 생명력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위협한다. 원래 빨갱이(Commie, Red 혹은 赤色分子)란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었으나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여기저기 사용된다. 이미 유물로 인식된 1950년 매카시즘(McCarthyism)은 한국에서 다양하게 변화·발전해 오고 있다. 

<b>분단 트라우마를 넘어 </b>

1948년 두 국가 체제가 시작된 이후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분단체제를 청산하고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분단 트라우마는 전쟁, 빨갱이, 반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극복될 수 있다. 뿌리 깊은 갈등괍 불안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우리 속담에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 자라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11·23 연평도 사건 이후 섬 주민이나 일부 국민들은 국군의 폭격 연습을 보면서 ‘혹시 북한이 맞대응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전쟁 트라우마에 연일 시달리는 국민들은 화살을 현 정부에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제 타격’이라는 원칙을 내세우고 ‘분단국가에서 군사훈련은 당연하다’며 더욱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과거의 전쟁을 되돌아보고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까. 앞으로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펼쳐 트라우마를 넘어설 것인지를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해결방안 중 하나는 아직도 은폐된 진실과 거짓의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 책이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b> 전쟁 트라우마</b>

제1부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편은 한국전쟁 중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부친 김용주(주일한국대표부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한국전쟁 중 윌리엄 시볼트(주일미국정치고문), 요시다(일본내각수상)와 협의해 ‘빨갱이’로 지목된 재일조선인들의 강제소환에 적극 나섰다. 

그는 일제강점기 1937~1945년 포항읍회의원을 지냈으며,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위위원회 결성식에서 ‘황군(일본군) 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내자고 제안해 태평양전쟁 협력에 나섰다. 

또한 전쟁 중 쓰시마에 거주한 재일조선인들이 어떻게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정쟁 와중에 밀항했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b> 빨갱이―반공 트라우마</b>

거제도포로수용소 내의 대한반공청년단은 포로들의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필자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1951년 7월 23일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실에 보낸 일일보고서에서 “수용소에 공작원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7월 26일 대통령비서실과 미군 제8군단에 통보됐다. 그 이후 수용소 내에는 ‘반공포로’가 탄생하게 되었다. 

<b>분단 트라우마를 넘어 </b>

지난해 4월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전두환, 김영삼 양 전직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YS는 “모친이 간첩에게 살해당했다”고 소개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YS의 모친 살해사건은 북한에 의해 파견된 고정간첩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정설처럼 되어 있다. 

이 사건의 주모자이자 ‘간첩단 수괴’로 알려진 윤병윤(경남 거제시 연초면 다공리)은 1961년 9월 15일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언론과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최근 필자가 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1969년 부산형무소 &#65378;윤병윤 명적표&#65379;에 1961년 7월 21일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그는 1969년 7월 헌병대에 이첩되어 총살됐다. 윤병윤은 형무소에서 “나는 살해사건과 관련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과 관련된 윤병윤과 같은 마을의 청년 7명은 경찰의 고문에 거짓 자백으로 최대 징역 15년에서 최소 징역 6개월까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까지 YS 모친 살해사건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미제(?)로 남아 있다. 

]]></description>
<author>오정미 기자</author>
<pubDate>Thu, 03 Mar 2011 20:19:02 GMT</pubDate>
</item>
<item>
<title>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27935229425133020</link>
<description><![CDATA[우남 이승만 박사와 몽양 여운영의 추도식이 같은날 치러진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 이 19일(월)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도식은 김문수 경기도지사,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유족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최재분 장로(신앙세계 발행인)의 기도,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의 특송, 김삼환 목사의 설교, 고인의 말씀(육성녹음), 경기도지사의 추도사에 이어 분향 및 이인수 박사의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된다.

우남 이승만박사(1875.3.26~1965.7.19)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전단을 배포했다가 이로 인해 징역 7년형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 을 저술했다.

‘독립정신’ 에서 국제간의 외교와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우남 이승만박사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b> 몽양 여운형선생 63주기 추모식</b>
 
조국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선생 63주기 추모식' 이 19일(월) 11시 강북구 수유리 묘전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여철연)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손용호 서울북부보훈지청장,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관련단체장과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및 유족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전창일 기념사업회 이사의 경과보고, 여철연 기념사업회장의 식사, 손용호 서울북부지청장,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전 국회의원의 추모사, 봉도가에 이어 여인영 대구중공업회장의 유족인사와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또한 추모식에 이어 오후 2시부터 서대문역사공원 내 독립관 강당  에서 몽양 서거 63주기를 맞아 “몽양 여운형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한 반론”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몽양(夢陽) 여운형선생(1885.4.24~1947.7.19)은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8년에는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1918년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우리들 소식’ 을 발행했으며, 8월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 2.8독립선언을 촉발케했다. 또한 국내에 김철, 선우혁 등을 파견, 국내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도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3.1만세운동의 분위기를 높여나갔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20년 조국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 조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勞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문제가 부상하자,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고,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했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였으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 조국광복을 준비했고,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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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Sat, 17 Jul 2010 16:38:1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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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주여고 경아연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촉구 서명운동</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27345520922633020</link>
<description><![CDATA[최근 일제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북 경주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경아연’이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는 말과 함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b>‘경아연’ 이 보내온 글</b>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뜻하는 용어로 1994년 ‘여자 정신 근로령’ 이 제정되면서부터 일반화 되었는데, 우리가 쉽게 혼동하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는 다른 것이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는 다르게 군수공장에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이 쉽게 둘을 혼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군위안부들은 처음에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였으나 보초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못낸 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하루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당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위안부'들을 손으로 때리거나 칼로 찌르기도 했다.

위안부들은 일제가 패전하자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한데 모아 죽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했던 경우도 많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 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버려져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군대와 함께 영광의 죽음을 하도록 강요되거나, 동굴에 모여져서 폭탄을 터트려 죽임을 당하거나, 연합군에게 넘겨져서 또다시 봉사하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정신대는 매주 수요일 12시에 정기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아울러 한국정부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유엔 등 국제기관 및 단체들과 다른 아시아 피해국과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생존자복지위원회를 두어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자의 생활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역사왜곡 교과서를 펴내는 새역모의 위원들은 “위안부는 역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이 못된다. 방 안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방이 지저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죄 많은 일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더러운 일본인이라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게 가르칠 순 없다. 위안부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은 같은 민족이었다. 자기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가고 공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하곤 한다.

<b>이제는 잊지 말아요</b>
 
경아연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제 할머니들은 단 86명만 남아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다”며 서명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Mon, 10 May 2010 10:33:2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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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취도기념비’ 관련 공개토론회 개최하자</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1289982114951020</link>
<description><![CDATA[10일 ‘취도기념비’ 를 두고 갈등과 대립구도를 그리는 것으로 비춰졌던 거제지역시민단체연대회의와 사등면취도관련대책위원회가 공동명의의 공개토론회 개최를 제안했다.
지난 9월 23일 거제시 사등면사무소에서 좌담회를 가졌던 두 단체는 이날 공동으로 “취도 현장확인에 나서는 등 향후 취도 기념비에 관한 모든 일의 협의와 추진을 함께 하기로 했다” 고 발표했다.
양 단체는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는 역사바로세우기의 같은 길위에 서있고 일제잔재 청산의 의지가 남다르지 않은 것을 서로 간에 확인했으며 또 그간의 논쟁과 오해는 방법의 차이와 다름이지 본 취지와 뜻에서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 밝혔다.
거제지역시민단체연대와 사등면 취도관련 대책위원회는 ‘취도기념비’ 에 대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개토론회  개최를 거제시에 정식요청했으며 이 토론회를 통해 지역의 관심있는 인사와 전문가들로 ‘취도관련 범시민대책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거제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단체는 또 본의 아니게 특정언론을 통해 잘 못 전달된 부분을 바로잡으며 앞으로의 언론제보와 기사송고를 ‘취도관련범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기 전까지 사등면발전협의회에서 일괄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신용웅 사등면 발전협의회 회장은 “지난 6월 1일자 K타임즈에 게재된 ‘취도기념비를 관광상품화 한다’ 는 취재 인용구는 사등면 발전협의회에서 의결된 적이 없는 사항을 허위보도함으로써 마치 사등면민들이 분별없이 관광상품에만 혈안이 된 것처럼 인식돼 사등면민 모두의 명예에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고 주장했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Tue, 11 Oct 2005 11:36:5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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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낯 뜨거워지는 역사 바로 세우기</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1211234514433020</link>
<description><![CDATA[<p>최근 취도 기념비를 둘러싸고 시민들 사이에 설왕설래 하면서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 바 그 논의의 중심축에 서 있는 한 시민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 글을 써 본다. </p><p>지난 5월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야욕으로 민족의 분노가 뒤 끓을 때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등면 가조도 앞바다에 지난 날 일본사령부가 세웠던 취도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이 거론 되면서 시민단체연대에서는 취도 답사를 기획했으며 차체에 우리 지역에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철거를 논했던 적이 있었다. </p><p>그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철거를 추진한다’는 내용으로 일부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이것이 사등면 주민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철거만이 능사냐. 존치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아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철거반대 결의대회를 하고 대책위를 결성, 마치 시민단체와 사등면 민들이 ‘철거’와 ‘존치’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비쳐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다.</p><p>거기에 더 보태어 심지어는 ‘러일전쟁 승전기념비가 아니라 단순한 과거 회상비를 가지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모 신문에 시민단체를 엉터리로 게재) 무조건 철거를 주장하는 몰지각한 단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br/>뿐만 아니라 취도비의 본질인 역사 바로 세우기를 논하기도 전에 관광상품화 하여 수입원으로 활용해야한다는 등의 비본질적 이야기가 주로 거론되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 접근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어 거제 시민들에게 바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p>먼저 취도비를 러일 승전을 기념한 송진포비와는 달리 단순히 회상비 라고 하면서 존치를 주장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비를 세우게 된 여러 정황과 새겨진 글귀를 잘못 이해해서 생긴 역사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br/>생각해 보라. 외딴 작은섬 취도에 달랑 세운 돌비석 하나가 아니라 포탄을 상징으로 웅장하게 공원화해서 기념비(450cm)를 세운 저들의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기념비 뒷면에 ‘바위는 포탄에 모래알같이 부수어져 옛 취도의 형태는 자취도 없어졌네. </p><p>이 기쁘고 기쁜 일이 천년이 가며 황국의 이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해군의 공명을 높이 기리기 위해 이 섬에 내가 와서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노라’고 이치무라 히사오 중장이 비문을 썼는데 이 비는 러일전쟁 30주년(1935.8.23) 승전을 기념해 진해해군요항사령부가 주도해 부산 죽본조(송진포기념비건설 일본업체) 회사가 제작했던 것이다. <br/>다시 말해 이 비는 그들의 함포사격장에서 ‘일본해군과 황국의 위용’을 뽐내며 침략한 ‘작은 조선(취도로 은유)은 저들의 포탄(힘) 앞에 맥없이 무너졌고 모래알처럼 부셔져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황국(일본)은 영영할 것이라’고 시(詩)로 노래하고 있다. </p><p>어찌 이 보다 더 우리민족을 모독할 수 있으며 이 보다 더 오만불손한 시비가 어디 있겠는가? 이 치욕스러운 기념비를 두고 단순한 회상비 라고 주장한단 말인가? <br/>시를 잘 모르는 본인이 그냥 딱 보아도 느껴지는 은유와 복선을 진정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br/>당시 준공식에 참석한 요항사령관 소림 중장은 “취도 기념비는 도고 사령관의 업적을 기리고 지나(만주)사변 이후 황군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축제장으로 세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p><p>1935.8.25 부산일보에 게제 된 기사에서는 “취도는 진해만 서쪽에 위치한 자고 외로운 섬이다. <br/>과거에 일본해군 동양함대가 당시 밤낮으로 맹훈련하던 곳이다. <br/>다가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데 촉매제 역할을 담당할 해군 용사들은 취도기념비를 보면서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필승을 다짐한다”고 기록하는 역사적 자료근거가 있는데, 이 어찌 단순한 회상비라 할 수 있단 말인가? <br/>지난 날 역사를 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취도에 대한 온갖 사려 깊지 못한 대책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p><p>이제 정확한 역사인식 바탕 위에 취도비의 자리매김을 위해 전 거제 시민들이 지혜를 모아 어떻게 해야 할 것이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며 그 결정은 ‘후세에 부끄럽지 아니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br/>그리고 난 후에 철거와 존치를 논해야 할 것이며 역사교육현장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br/>따라서 시민단체연대는 원점에서의 허심탄회한 논의를 통해 온 시민들의 중지를 모으고자 범시민공개토론회(7.5.)를 개최했으나 반대 측의 토론 참여 거부로 무산되어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p><p>하지만 앞으로도 시민단체연대는 인내하면서 묵묵히 반민족친일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열어가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취도비 문제에 접근해 나갈 것이며, 여러 다른 방향의 주장과 논의 또한 같은 방향과 충정임을 믿으며 종국에 같은 점에서 만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br/>이제 더 이상 취도비로 인해 존치니 철거니 하면서 어리석은 소모적 논쟁으로 서로 대립해서도 안 될 것이며 갈등을 조장하거나 부추겨서도 안 될 것이다. </p><p>저들이 세워 놓은 하잘 것 없는 돌탑 하나로 우리들끼리 서로 아웅 다웅 하면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을 저들이 본다면 우리네 민족을 얼마나 우습게보겠는가? <br/>보나마나 반색하며 박수칠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진다. <br/>차이는 다름이 아니기에 서로를 인정하면서 전 시민이 공감하는 대안을 만들어 부끄럽지 않은 거제를 만들어 가야겠다. <br/></p>]]></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Tue, 12 Jul 2005 08:10:5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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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취도 기념탑 8.15에 철거하자</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1138978804078020</link>
<description><![CDATA[거제시 사등면 해상 취도 러.일전쟁 기념탑 철거 움직임이 시민단체 등을 통해 구체화될 전망이다. 오는 8월 15일 해방 60주년을 맞아 철거해 역사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여론이 그것이다.
러일전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이 취도기념탑은 “러일전쟁의 승전을 기리고 황군의 사기를 드 높인다” 는 형식을 갖추고 실제로는 임란당시 일본이 당한 패전의 치욕을 용감한 황군들이 되 갚아 왜구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적인 성격이 크다. 
취도 기념비 철거를 주장한 <모닝뉴스>의 보도에 이에 최근까지 지방언론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일제침략 잔재를 철거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해왔다. 18일 시민단체의 한간부는 <모닝뉴스>와의 통화에서. "오는 8월 15일 해방 60주년을 맞아 철거식을 가져야 하며 이 일에는 거제시민과 지역언론사가 참여하는 행사로 진행되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중 시민단체연대회의를 개최해 정식으로 철거운동을 제안할 것” 이라고 밝힌 이관계자는 "각 언론사와 사회·노동 단체 등에 제안서를 발송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기념탑 철거문제에 대해 거제시는 “시가 주도하기에는 조심스럽다. 거제시민들이 요구한다면 검토해 보겠다” 는 입장을 밝혔다.
경남근현대사 연구회관계자는 “취도 기념탑 철거문제는 해방 60주년을 맞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며 “기념탑 철거이후 송진포 기념비와 함께 일제의 침략야욕을 한 눈에 보여 주는 거제역사관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Tue, 19 Apr 2005 17:04:40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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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속보]취도 기념비 일제잔재 청산하자</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1117988573962020</link>
<description><![CDATA[<b>[속보]=</b>‘취도 일본전승 기념비 민족혼 짓 밟는다’ 는 내용의 <모닝뉴스> 보도 이후 ‘도고헤이아지로’ 의 송진포 기념비와 취도 현지취재에 나서는 방송사와 언론이 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는 3월 28일자 신문에 ‘거제 일본 승전비 60년째...’ 라는 제목으로 <모닝뉴스>의 사진을 받아 기사화 했으며 <연합뉴스>와 KBS 도 거제시청 문서창고에 보관된 ‘도고승전비’ 와 취도 현지취재에 나섰다.

해방 60년이 되도록 남해안 임란대승첩지의 한복판에 세워진 일본군을 찬양하고 왜구의 넋을 위로하는 비가 버젓이 세워져 있어 민족혼을 짓 밟는다는 <모닝뉴스>의 보도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모닝뉴스> 보도이후 신문사에는 비석을 없애야 한다는 전화가 계속됐으며 비석이 문화재인지 등을 문의하고 취도의 위치를 묻는 언론사의 전화도 잇 따랐다.
또한 송진포의 도고 기념비와 취도 승전비를 없애고 비석의 모조품을 만들어 고현시내에서 시민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해 ‘독도분쟁’ 을 일으킨 일본정부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일부에서는 거제지역 시민단체가 나서 시민들의 울분을 삭힐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등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도고 기념비가 국내외적인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b>취도 일본전승 기념비 민족혼 짓 밟는다</b>

<b>[1신]=</b>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승첩지인 견내량 수로, 남해안의 한 섬에 해방 60년이 되도록 청산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워져 민족혼을 짓밟고 있다. 
거제시 사등면 취도에는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무적 발틱함대를 물리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해이아지로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이 세워진 취도는 50여평의 작은 무인도로 탑은 높이 4미터, 둘레 2미터의 견고한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탑 상부는 포탄을 하늘을 향해 세워 두고 있다. 

#그림1중앙#일제치하인 1935년 8월 23일 세워진 것으로 보기 힘들 정도. 기념탑 주변의 기단만 훼손됐을뿐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금이 간 탑신을 보수한 흔적까지 있다. 
가조도 주민들은 “어릴때부터 일제시대에 세워진 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별 관심없이 대해왔다. 민족혼을 어지럽히는 일제의 잔재는 하루빨리 청산돼야 한다” 고 입을 모았다. 

한 주민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며 일본정부의 야비한 술수에 교훈을 보여줄 때” 라고 응수했다. 
일본내에서는 신사까지 만들어 군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해군의 아버지’,  ‘이순신 장군’ 영국의 ‘넬슨제독’ 과 함께 ‘역사의 영웅’으로 기록된 군국주의의 상징 도고제독의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이 선조들의 피값으로 지켜낸 조국, 남해안 심장부에 혈도를 누르듯 세워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림2중앙#공교롭게도 도고 승전기념탑이 세워진 거제시 사등면 해역은 임란당시 우리수군과 왜구가 13차례의 교전을 벌인 지역의 정 중앙에 해당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도요토미의 병사(病死)로 1598년 11월 27일 패망 철수할때까지 왜는 16차례의 중요 해전을 치렀으며 명량해전, 노량해전, 부산포해전을 제외한 13차례의 전투가 이곳 취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선조들은 칠천량 해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왜군을 대파한 기록이 있다. 

러일전쟁 당시 송진포를 주둔지로 삼은 일본군은 구국의 혼이 서린 심장부에 해당되는 취도를 함포 사격장으로 활용했다. 
결국 이들은 우리선조들의 혼이 서린 곳을 함포사격장으로 활용한 셈이며 이후에는 이곳에 “황군의 사기를 높인다” 는 명목을 네세워 기념비를 세웠지만 실상은 이곳에 수장된 왜구의 넋을 위로하고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3왼쪽##그림4오른쪽#취도승전기념비 준공식에는 일본주둔군은 물론이고 지역주민들까지 치욕스런 현장을 지켜보는 수치를 당했다.

취도 승전기념탑외에도 거제시청 문서창고에는 송진포에 세워졌던 도고의 승전기념비가 보관돼 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일본 혜월사에 있는 하청북사 동종과 교환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최근 독도문제가 불거지자 “일본은 문화재를 도둑질 해 간 것으로 당연히 반환돼야 하며 우리가 대가를 지불할 문제가 아니다” 며 더 이상 보관해서도 안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우호적이고 이성적인 이웃 정부와 국민의 노력에도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며 국민들에게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을 교육하는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의 망령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공개적인 취도의 일제잔제 청산이 시급하다. 

취도 승전기념탑은 "취도기념(吹島記念, 높이 450cm)" 해군중장 코바야시 세이자부로(小林省三郞, 일본해사 31기)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취도회고(吹島懷古)"라고 조각되었고, 비문에는 "吹島在鎭海灣西陽日露戰爭之際我聯合艦隊徒?在干此日夜行實彈射擊以此島爲標的始不留原形日本海之功名赤多所員干此島令建碑?詩以頌之云…", 이치무라 히사오(市村 久雄, 일본해사 31기) 중장으로 되어있다. 

건립된 시기는 소화 10년 8월(1935년 8월)로 기록되어 있지만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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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Sat, 26 Mar 2005 10:00:5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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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되짚기] 차별과 저항의 역사 '백정'</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1046572013614020</link>
<description><![CDATA[지금 고깃간 주인들을 백정이라고 부르면 다들 펄쩍 뛸 거다. 사실 백정은 고기 장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도살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썼으니까 애꿎은 정육점 아저씨들을 끌어들이면 곤란하다.
그러나 지금은 도살업자도 백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오늘날 직업으로서의 백정은 사라졌고 끔찍한 살인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인간백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비유어로 쓰는 백정만 남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백정은 원래 도살업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중국 수나라에서 백정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그 말이 전래되면서도 그냥 백성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조선 초까지도 그랬다.
백성(百姓)과 백정(白丁)은 우리말로는 비슷해도 한자로는 전혀 다르다. 그럼 왜 백정이라는 이름에 굳이 흰 백자를 썼을까. 그건 농토가 없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백’은 ‘하얗다’라는 뜻도 있지만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도 있다.-
백정은 비록 일반 농민으로 대우받았지만 국가에서 부여하는 직역이 없었으므로 경작할 토지도 받지 못했다. 직업이 없으니 봉급을 받지 못한 것이라 보면 된다. 직업을 구하지 못한 실업자는 자조적으로 ‘백수 건달’이라고 자칭하지 않는가.
백정은 노비가 아닌 양인(良人)의 신분이지만 일반 농민에 비해서는 처지는 위치였다. 이따금 국가 비상시에는 백정도 군대에 편입해 정규군을 지원하는 예비군을 구성했고 이 경우에는 이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신분상으로 어엿한 양인이었던 백정을 졸지에 천인(賤人)으로 전락시킨 사람은 바로 조선 세종이다. 오늘날까지 가장 존경받는 임금인 세종대왕이 양인을 천인으로 만드는 그런 일을 일부러야 했겠는가.
고려 사회의 천인들로는 노비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그 밖에 광주리 따위를 만드는 유기장, 광대 노릇을 하던 재인, 그리고 화척(禾尺)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화척 때문에 백정은 천인이 된다.
이들은 여진이나 거란 등 북방민족 출신인데 고려로 귀화한 사람들이다. 일반 백성들과 융합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걸핏하면 왜구로 위장해 민가나 관청을 약탈하거나 거란이 침입해 들어올때 길잡이 노릇도 했다.
당연히 정부에서 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범죄 행위가 어려워지자 일반 백성들이 꺼리는 궂은 일을 생업으로 삼고 살았는데 그게 바로 도살업이다. 수렵민족 출신답게 짐승의 고기와 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능했던 탓이다.
세종은 화척의 지위를 올려주기 위해 이들을 양인으로 대우하는데 국가가 부여한 직책과 토지가 없으니 백정(당시에는 양인신분)에 편입할 수 밖에 없었다. 화척은 마침내 양인이 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들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정부 시책처럼 그렇게 쉽사리 바뀔 수는 없다. 백성들은 그들을 기존의 백정과 구분하기 위해 ‘신백정’이라 부르며 여전히 백안시했다.
전과자의 재범률이 높은 건 일반 사람들이 그들에게 사회 적응의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그건 신백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화척은 백정으로 신분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의 골칫거리였다.
신백정의 악명이 높아지자 원래 백정들도 백정으로 자처하기를 꺼리게 되고 점차 신백정은 그냥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의 대표적 생업인 도살업과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를 지니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에서도 이들을 천인으로 분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도적으로 신분상승을 시켰던 것이 오히려 신분하락을 가져 온 셈이다.
천인이 된 백정은 무려 400여년이 지난 뒤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비로소 천인 신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때에도 역시 정부시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보는 시선이 문제가 된다.
제도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일반 평민들과 통혼할 수도 없었고 관습상 여전히 천인의 대우를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고 이들에게는 정치적 자유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정부가 해줄 일은 없고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이들은 1923년 ‘형평사’라는 전국 단체를 조직하고 백정이라는 이름과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 철폐, 그리고 직업의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조선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써 왔던 일제는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문서에 붉은 점으로 표시를 해 여전히 백정을 차별한다.
이제는 백정에 대한 사회의 인식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인식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진정한 적, 일본 제국주의가 목표가 된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과 맞물려 이들의 운동은 차별 철폐와 직업의 자유를 넘어 사회주의 운동, 민족 해방운동으로 나아간다.
형평사는 조선청년동맹, 조선노동총연맹 등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 융합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인간백정’이라는 말만 남고 실제 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전적으로 그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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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Sun, 02 Jan 2005 18:13:2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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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순신은 과연 옥포해전에 참여했는가</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0968475263180020</link>
<description><![CDATA[이순신은 과연 옥포해전에 참여했는가. 우리에게 다소 의아스러운 물음이다.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했는가에 대한 논란은 권율, 이순신과 함께 임란 최대 공신 가운데 한 사람인 원균이 모함꾼도 비겁한 장수도 아닌 이순신과 역사적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다시 관심을 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거제지역출신 향토사연구가였던 고 원용목씨는 지난 89년께 200자 원고지 26쪽 분량의 친필원고를 남겼다.
이순신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원균 바로잡기는 그에게 있어 필생의 소원이었다. 원용목씨는 남북한의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등 조선사 연구, 특히 임란당시의 시대상황과 우리지역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남 달랐으며 ‘거제가 독로국이 아니었다’는 일관된 주장을 해온 대표적 인사였다.
 거제의 고로쇠 수액 축제도 원용목씨의 공이 컸다. ‘거제문화사’ 도 그가 남긴 족적 가운데 하나다. 그가 남긴 대표적 물음 가운데 하나가 ‘이순신은 과연 옥포해전에 참여 했는가’ 였다. <모닝뉴스>는 10년 넘게 묵혀둔 이 의아스러운 물음을 그의 친필원고를 통해 소개한다.
<b>이순신 그는 민족의 대 영웅인가</b>
우리가 배우기로는 임진란의 풍전등화 같은 전국(戰局)을 임진년 5월7일 잘 정비된 이순신 군(軍)의 최초의 출동으로 옥포선창에서 일격을 가해 역전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순신(李舜臣)이야 말로 임진란을 승리로 이끈 민족의 대영웅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식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의 읽을거리로부터 중학교국사교과서, 고등학교국사교과서, 대학의 교양국사가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백성들이 영리해진 것이다.
영리한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의 전공(戰功)들이 당시의 상황과 지형들과 역사 사실들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것이다.
‘원균정론’ 이란 책을 쓴 이재범씨는 지형상황과 배 상황이 안 맞는 것을 지적하고 ‘이순신의 기록은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거제도의 송미포(松未浦)는 그 명칭이 松美浦, 蘇泰浦, 所珍浦 또는 송진포(松眞浦)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리의 지명이다. 
이 송진포는 거제도 북단에 있으며 여기에서 천성 가덕으로 가자면 우선 동쪽으로 가다가 거제도 동북의 끝에 이르면 다시 북진을 해야한다. 그러나 옥포는 거제도동북단에서 천성 가덕과는 정반대방향인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먼 거리에 있어 적선의 유무를 전혀 볼수가 없는 거리에 있다. 
특히 옥포의 선창은 지리적 조건으로 그 외양에서는 옥포의 선창이 보이지 않을뿐만아니라 내양에 들어가서도 50m정도로 근접하지 않으면 선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옥포선창에 있는 적선을 무슨 재주로 천성 가덕으로 가다가 발견하였단 말인가’ 하고 아주 높은 음성으로 반문하고 있으며 부산의 박수연씨는 장승포시의 해성고교 교지 ‘은행’ 8호의 ‘거제수논쟁’난에 ‘거제도에 관련된 너무나도 사실에 안 맞는 것으로 이순신의 옥포파왜병장을 들수가 있다.’
‘한산도(당포의 착각인 듯)에서 5월6일 35㎞의 거리인 거제도의 장목면 송진포까지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저녁 9시까지 부지런히 갔으나 날이 저물어 더 못가고 송진포에서 밤을 새우고 5월7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적이 있다는 가덕도를 향하여 가다가 정오 무렵 옥포선창에 대어놓은 적선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씨(논쟁상대자 해성중교감)가 근무하고 있는 해성중고의 최고 옥상에서 눈 딱고 보아도 당시(임진란)의 옥포선창인 지금의 옥포의 조라마을회관 지점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하물며 가덕도로 가다가 옥포선창을 볼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역시 강력한 톤으로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쪽으로 묻고 있다.
울산대학교의 이정일교수의 ‘원균론’ 에서도 ‘원균은 옥포해전을 비롯한 곳곳의 싸움에서 전필선등(戰必先登)하여 다대한 전공을 세웠던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임진년 5월10일자 ‘평양행재소’에 보고된 민종신의 ‘원균 적선 50척 당파’라는 보고를 ‘옥포해전의 보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육군대학교 부총장 어태우씨의 ‘임진수전의 원균과 이순신’ 이란 책에도 특히 옥포해전은 원균의 주도하에 진행된 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순신은 이들 저씨(諸氏)들이 품기는 주장처럼 옥포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가. 필자의 견해도 동감으로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조건 때문이다.
<b>이순신은 옥포해전의 선봉장이 누구인지 몰랐다</b>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했다고 하면서 옥포해전에서 원균의 아들 원사웅이 선봉을 서고 지세포만호가 전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원사웅은 당시 나이 18세였고 원균이 다섯딸을 낳은 후 막내로 낳은 외아들이며 만석군부자 원후랑의 장손이었다. 그런 아직 어린귀한 청년이 선봉이 되어 적을 공격하는 걸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했더라면 보았을것이고 그랬다면 이순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을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선봉이란 남의 사표가 되는 것이므로 대단히 장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신라의 관창 청년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신라군의 선봉이 되어 많은 병사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족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유감이지만, 일본에서 노기마레스케 대장을 일본민족의 영웅으로 받드는 것도 로일전쟁의 여순,대련공격시 그의 두 아들을 앞장세워 전사케 하면서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순신은 원균을 비난하면서 10여세된 아들을 전공에 부쳤다고 무함을 하다가 이 사실의 사실여부를 조사하러 나온 병조판서 이덕형에게 탄로되어 이순신은 말문이 막혔다고 선조실록 30년2월4일자는 적고 있다.
한백록은 임진초기해전의 몇 안되는 장수인 지세포 만호이다. 이장령이 옥포해전에서 전해를 했는데 이순신이 옥포해전의 부근에라도 참여했더라면 어찌 중요한 해방진(海防鎭)인 지세포만호 한백록장군의 죽음을 모를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임진년 5월5일 6일 당포에서 영등포만호 우치적 옥포만호 이운용과 함께 지세포만호 한백록도 함께 장도에 올랐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b>적의 무력이 우리보다 우세했다</b>
적의 무력이 우리측보다 훨씬 우세했다. 신체의 상반부를 노출하지 않고는 조준이 안되는 활이 우리측 무기의 주종이었는데 반하여 적은 몸을 감추고 쏠수 있는 총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총은 성능시험이 이미 끝난 가볍고 정확한 조준이 되는 총이었다.
풍신수길이 임란발발 17녀전에 노부나가의 장수로서 나가시노싸움에서 다케다군을 전멸시킨 그 총이었으며 그들의 총은 철포의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큰 공장에서 대량제조되었다.
그총을 가진 적군과 조우하면서 아군측의 피해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순신은 ‘옥포파왜병전’에서 ‘순천대장선의 사부이며 순천에 사는 정병 이선지가 왼쪽 팔 한곳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 외는 전상자가 없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화살은 우리의무기이므로 이순신은 우리측의 피해없이 적선 40여척을 공파한 것이다.
이런판이니 어떻게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b>거리나 시간이 맞지않다</b>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 이순신의 행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송미포에서 옥포까지는 28㎞이다. 옥포에서 영등포까지는 20㎞이다. 또 영등포에서 마산합포까지는 27㎞이다. 합포에서 의창군 구산면 남포까지는 15㎞이다.
이순신은 그의 난중일기 병신년 7월21일자에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가죽을 가지러 본영에 배를 보냈다’라고 적고 있고 그 화급한 임무를 수행라는 곽언수가 7월24일 어둘녘에 만 4일만에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한산도에서 75㎞인 여수본영까지를 85시간이란 긴 시간을 소모하여 75㎞를 왕복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수십번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제일느린배를 기준하는 합동진군이 비록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진행됐다 하더라도 중간에 2번 3번 전쟁을 하고 저녁밥을 준비하기 위하여 나무 준비하고 물까지 긷다가 어떻게 90㎞나 진군한단 말인가.
이것도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증거가 된다고 본다.
<b>방향이 맞지않다</b>
방향이 안 맞는다. 이재범씨나 박수연씨의 주장과 같이 송진포에서 천성가덕으로 가다가 옥포선창을 보았다는 것은 보통 거짓말이 아니다. 옥포선창은 멀지않은 옛날에 있었던 옥포굴강을 말한다.
옥포굴강은 지금의 부산행 여객부두선창에서도 전연 보이지 않는 곳이다. 옥포선창이 관련된 장계모순 때문에 몇 년전부터 거제도의 외해를 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외해로 돌았다면 시간이 더더구나 안맞을 뿐 아니라 역시 옥포선창이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순신은 옥포파왜병전에서 옥포해전을 하고 영등포전양으로 물러나와서(강조하고 있다) 군졸들에게 땔나무 하는 일과 물긷는 일을 명령하고 밤을 지낼 준비를 하다가 또 하오 4시경 멸지않은 바다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하므로 마산합포까지 쫓아가서 왜적이 육지로 올라간 빈 배들을 남김없이 격파했다고 적고 있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당시는 진해현 소속이었다) 남포에 대어 결진하여 밤을 지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빠른 배를 두고 이순신은 75㎞의 여수본영을 오가면서 갈때도 이틀, 올때도 이틀, 그리고 진주에서 만나자는 이원익을 찾아 갈때도 겨우 55㎞ 이것만 갈때도 이틀, 올때도 이틀씩 걸리고 있다.
이순신이 공무로 나가면서 제일빠른 배를 탓을 것은 당연한데 왜 이틀씩이나 걸렸으며 옥포해전시는 느린배를 기준했을터인데 어째서 그처럼 빠른가 이다. 이것도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b>선조실록 초기전공은 허위암시</b>
선조실록의 기록들이 이순신의 초기전공이 허위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는 사실이다. 선조실록 25년 8월24일자 기록은 ‘비변사에서 장계를 올렸습니다. 경상도 원균이 올린 승전장계는 전일 이순신이 올린 한산도(옥포의 오기)등지의 싸움과 같은 장계입니다. 싸움의 대소에 따라 반드시 차등이 있어야 하겠는바 여기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을 베인 것으로 기준해 보면 전력을 다하여 혈정을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으며 선조실록 30년 1월27일자 기록은 ‘이순신은 얌전한체 하나 다만 속임수가 많아서 잘 싸우려하지 않는다’ 던가 선조실록 36년 6월26일자 기록 ‘원균이 사로잡은 적장의 누선이 도로혀 이순신에게 빼앗겼다’ 는 기록등과 선조실록 36년 4월21일자 기록 ‘이순신은 임진년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더불어 거제양중에서 적선 50여척을 무찔렀다. 그때 그 해전의 작전계획과 선봉은 모두 원균이 한 것이었다.
대첩이 있은 뒤 원균은 연명으로 장계코자 하였더니 순신은 밤을 타서 행조에 장계하였으되 전공을 모두 자기가 한양 과장되이 보고하고 원균의 공이 없다 고 하는 기록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하였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b>임란초기에 과연 전쟁을 했다면</b>
이순신이 임란초기에 과연 전쟁을 했다면 그 실력으로 얼마든지 전쟁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조정에서 이틀이 멀다고 전쟁을 독려하러 선전관을 한산진영에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날마다 활이나 쏘고 짐승이나 잡아 포식하며 을미년 2월27일 원균이 한산진영을 떠난이후 전쟁을 한 사실이 없다.
우리역사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임진난의 18차의 해전중 원균이 전사하고 난 후인 노량전쟁을 제하고는 전부 원균이 참전을 했다. 이런 사실과 병신년 12월12일자 부산진적군영에 불을 질러 당시 있지도 않은 적 가옥 1천호 적 화약고 2채, 적 잡물창고 및 양식 2천600석등을 불살라 버렸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했다가 탄로가 나서 정유년 2월26일자 조정을 한없이 속인죄로 잡혀간 사실들을 비추어보면 이순신이 옥포해전에 참여했다는 것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author>
<pubDate>Mon, 04 Oct 2004 08:52:0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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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되짚기] 연개소문과 당 태종</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0963668523163020</link>
<description><![CDATA[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경험적인 얘기지만, 나라가 태평스러울 때 설사 영웅의 재질과 기질을 갖춘 사람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터이다. 중국 역사상 걸출한 영웅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세민, 곧 당 태종도 바로 그랬다.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벌인 한판 승부에서 완패한 수나라는 통일 왕조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40년을 채우지 못하고 북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망한다. 반란군의 지휘자는 군벌 출신의 이연이었다.
장안을 접수한 반란군은 곧 정부군이 되어 쿠데타의 공식에 따라 왕위에 오른다. 수 양제의 손자를 왕으로 옹립했다가 얼마 안 가 폐위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이연이 즉위하니 그가 당 고조다.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쿠데타를 건의하고 실행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아들은 둘째인 이세민이었다. 맏아들 위주의 엄격한 중국 질서에서 그에게 왕권이 돌아올 리 없다. 하지만 그 맏아들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세민은 이 간단한 추리를 현실로 만든다. 태자로 책봉된 형 건성과 아우 원길마저 죽이고 왕위에 오른것이다. 큰 쿠데타와 작은 쿠데타를 모두 성공한 그는 군인으로서도 탁월했지만 정치가로서도 뛰어났다.
이세민이 집권한 23년간 당은 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정관(貞觀 당태종의 연호)의 치’라 불리는 시절이다. 특히 그는 전대의 역사서를 편찬하게 하여 인류역사에 큰 공헌을 하는데, 그 가운데 ‘진서(陣書)’는 직접 서술하기도 했으니 여러 가지 면에서 영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그는 돌궐과 고창국을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동양의 패자가 되었다. 유독 정벌하지 못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구려다. 패배를 모르던 그에게 쓴 맛을 안겨 준 사나이는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이 등장할 당시 고구려는 살수대첩의 두 영웅 건무와 을지문덕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고 있었다. 영류왕 건무는 일찍이 장수왕 때처럼 북수남진(北守南進)을 외친 데 반해 을지문덕은 수나라 말기 쇠약해진 중국의 상황을 이용해 북진할 것을 주장했다.
젊고 패기에 찬 연개소문은 당연히 을지문덕을 좇아 북진을 주장했는데, 이 때문에 영류왕과 군신들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마침 지방에 대가(大加 고구려의 관직)로 있던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은 일단 몸을 피신한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왕과 군신들이 끝내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쳐들어가 영류왕과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고 허수아비 보장왕을 세운다.
집권 방식도 닮은 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맏아들인 남생이 633년생인 것으로 미뤄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당과 고구려 간의 전운이 무르익으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어차피 맞붙어야 할 적수로 점차 떠오른다.
수나라의 원한을 갚고 동양을 천하통일하려는 당의 낌새를 눈치 챈 연개소문은 먼저 백제 의자왕과 동맹을 체결해 전쟁이 벌어질 경우 고구려는 당을, 백제는 신라를 담당하기로 역할 분담을 한다. 그러나 이세민은 15년간의 치적을 통해 나라의 발전을 이루고 정권을 안정시킨데 반해 연개소문은 이제 막 집권한 처지였다.
전쟁의 계기는 묘하게도 연개소문의 집권이었다. 644년 이세민은 자신도 쿠데타로 집권했으면서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백성을 탄압하며 내 명령을 받들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이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수나라의 패인을 분석하고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해 왔으면서도 연개소문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결국 패하고 만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불세출의 명장 양만춘이 지키는 요동의 안시성이다.
연개소문은 요충지인 안시성을 양만춘에게 맡겨 철저히 수비하고만 있으라고 명해 놓고,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정병을 이끌고 후방의 임유관을 기습해 주의를 분산시킨다. 후방을 기습당하고 부랴부랴 회군하는 당군은 다시 연개소문에게 결정타를 맞는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이세민은 원정을 극구 말리던 당 제일의 장군 이정의 충언에 따르지 않은 걸 몹시 후회한다. 그러나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왼쪽 눈 마저 잃고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고구려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된다.
그래서 수나라처럼 ‘고구려 콤플렉스’에 걸려 재차 원정을 계획하지만 한번 싸움에 혼이 난 군신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화살에 묻은 독이 발병의 원인이 되어 5년만에 사망한다. 다시는 요동을 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이로써 연개소문은 홀로 남은 외로운 영웅이 되었지만 그도 역시 늘 염두에 두어 오던 중국 원정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가 죽고 만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 고대 사상 최대 전쟁이었던 수와 고구려, 당과 고구려 싸움에서 고구려는 모두 승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간의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나라가 흔들렸고 게다가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내분마저 심각해졌다.
결국 당 고종은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아버지 이세민의 유지를 묘하게 해석해, 신라와 결탁하고 먼저 백제부터 치고 들어와 멸망시킨다. 고립무원에다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간에 권력 다툼이 극심해져 고구려는 거의 자멸하다시피 멸망하고 만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둘 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지만 역사적인 평판은 정반대다. 이세민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형제들가지 살육했는데도 중국뿐 아니라 우리 역사학자들에게도 희대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반면, 연개소문은 왕을 살해한 사건만이 부각돼 ‘삼국사기’에는 “흉악하고 잔폭하며 무도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아마도 연개소문이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이 더욱 김부식의 심기를 건드렸으리라)
더구나 연개소문은 그 이름의 뜻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으며 출생년도는 물론 사망년도도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어,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마땅한 평가를 얻지 못하고 있다.
<b>[책과 세상]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저자 김용만</b> 
#그림1왼쪽#7세기 막강한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치며 동아시아를 쥐고 흔든 고구려의 중심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중국의 경극에서도 당태종 이세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군으로 묘사될 만큼 중국인의 잠재의식에 존재감을 각인한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역적으로 기록한 반면, 신채호와 박은식은 위대한 혁명가, 또는 민족 자존심을 지킨 탁월한 전략가이자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했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은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 등 국내외 각종 문헌과 기록을 토대로 역사적 상상력을 담아 연개소문을 추적했다. 저자는 642년(영류왕 25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전날 밤 고뇌하는 인간적 모습부터 그리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와 정면 대결을 피하자는 유화파와 강경파, 문신과 무신, 전통귀족과 신흥귀족 간의 대립이 극심한 상태였다. 마침내 왕과 몇몇 대신들은 대외 강경론을 주장하는 연개소문을 없애려고 했지만 먼저 첩보를 입수한 그가 거꾸로 왕을 베어버렸다. 
연개소문의 정권 장악 후 고구려는 당나라와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인다. 우리 역사상 가장 당당하고 자주적인 외교를 펼친 때였다. 영류왕 때는 당나라 사신이 왕에게 절도하지 않았지만, 연개소문이 지켜보는 보장왕 앞에서는 기어가 엎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저자는 당태종 이세민을 연개소문의 라이벌로 묘사한다. 이세민 역시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병법에 능하고 중앙정부의 통치를 안정시킨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은 645년 1차 고ㆍ당 전쟁과 661ㆍ662년의 2차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당군에 대항하는 고구려인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최고권력자 연개소문이 죽은 후 권력공백이 생기면서 아들 남생과 남건의 내분으로 고구려는 급격히 몰락한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던 듯 두 아들에게 “고기와 물 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지만 헛일이었다. 
역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구성된 이 책은 ‘연개소문은 왜 혁명을 일으켰을까’, ‘그는 왜 신라를 적으로 돌렸을까’ 등의 의문문으로 제목을 달고, 독자적 시각에서 역사를 새롭게 해석ㆍ평가하고 있다.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협상이 결렬된 이유, 고구려가 백제와 손잡게 된 내막 등을 밝히는가 하면 중국 사학자들이 연개소문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양만춘을 과대포장 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자료 고증이나 그 동안 연구결과에 대한 치밀한 검토보다는 한 개인의 영웅 만들기로 흘렀다는 느낌이 있지만, 베일에 싸인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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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author>
<pubDate>Tue, 28 Sep 2004 19:20:5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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