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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귀고리는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삼국시대때 가장 화려하게 각광받은 장신구
  • 입력날짜 : 2004. 08.29. 23:06
박물관에 전시된 금이나 옥으로 만든 귀고리를 보면서 그것이 남녀노소를 불문한 장신구였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조선 선조때까지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귀고리를 착용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선조는 남자들의 귀고리 풍습에 노하여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선조 5년 1572년).
"신체(身體)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라고 했다.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 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서울은 이 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하라."
임금이 직접 이런 명령을 내린 것만 봐도, 당시 남자들의 귀고리 풍습이 적잖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조의 전교 이후 남자의 귀고리는 사라졌고 여자들도 귀를 뚫는 대신 귀에 거는 파란 귀고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선조가 귀고리를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듯이 귀고리는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 전부터 즐겨 사용해 온 장신구이기 때문이다. 또 귀고리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부적의 역할도 했다.
귀고리가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은 것은 삼국시대이다. 당시의 무덤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귀고리가 출토되고 있고, 국보로 지정된 것도 여러개다. 귀고리의 재료는 금, 은, 청동, 금동 등 여러 가지였는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역시 금으로, 금귀고리는 신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가장 화려한 남자 귀고리는 화랑들의 것
남자 귀고리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것은 역시 화랑의 귀고리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원래 신라가 훌륭한 인재를 뽑기 위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어울리게 했던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 화랑은 같은 시대에 한 무리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많을 때는 7개의 화랑 무리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는데, 한 무리는 화랑 1명과 몇 명의 승려,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여러 사람의 낭도로 구성돼 있었다.
화랑은 자신을 추종하는 낭도를 거느린 지도자인 셈이다. 따라서 화랑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 것은 화랑을 선정하는 기준이었다. 당나라 승려의 신라 견문기인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화랑의 선정 기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귀인 자제 가운데 어여뿐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고 부르니 나랏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
화랑들은 대개 15살에서 18살 정도의 젊은이였다. 어여쁘다는 말을 붙여도 됨직한 나이다. 정작 중요한 언급은 그들이 분을 바르고 치장에 힘썼다는 것이다.
화랑들은 특히 멋진 옷으로 치장하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등 귀족의 자제로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사치를 부렸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귀고리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 화랑들은 자신의 무리가 더 뛰어남을 알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치장을 하고 금은 귀고리를 달았을지도 모른다.
조선 선조 이래 금지됐던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이 4백여 년을 건너뛰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아직도 남자가 무슨 귀고리냐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박물관에 꼭 가보라. 그곳에는 우리들의 먼 할아버지들이 자랑스럽게 귀에 걸었던 귀고리가 아직도 금빛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테니.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모닝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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