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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3백년 동안 이 땅을 거부한 고구마
고구마 재배 그 기나긴 역사를 찾아서
  • 입력날짜 : 2004. 07.18. 09:20
고구마에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고자 했던 숱한 선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18세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구황식물 고구마. 그러나 이 식물이 전국으로 전파되기까지는 무려 3백여 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 오랜 동안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구마 재배에 일생을 바쳤다. 이제 그 기나긴 역사를 찾아가 보자.
고구마 재배서인 '종저방(種藷方)'에 의하면 고구마가 조선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6세기 말인 선조 때라 한다. 그후 1633년(인조 11년) 비변사에서 고구마 보급에 노력했지만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 시대에는 남해안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닷가에 나갔다가 풍랑에 표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개 대마도나 일본 땅에 도착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한 어부가 조선에 돌아왔다.
일본 사람들이 고구마를 먹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그는 고구마가 구황작물로 적당하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1663년(현종 4년)의 일로,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구마 재배는 시작되지 않았다.
백성을 배고픔에서 구하려던 이광려의 집념
이광려(1720-1783)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참봉에 불과했지만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과 학식이 높아 당시 유학자 중 일인자로 추앙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고구마 재배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중국의 서적들을 뒤져 고구마야말로 백성들을 배고픔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광려는 먼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역관에게 고구마 종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부탁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광려는 다음으로 일본에 가는 통신사 조엄에게 부탁했다. 그때가 1763년이었다. 그는 고구마 한 포기를 구해 집에서 시험 재배를 했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광려는 이번에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부탁해 몇 포기를 더 구했다. 그러나 실험은 또다시 실패했고, 이광려는 끝내 고구마 재배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광려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민 노력에 감명을 받은 강필리(1713-?)가 이광려의 뒤를 이었다. 그는 이광려에게 자극을 받아 역시 통신사 조엄에게서 고구마 몇 포기를 구해 따뜻한 고장인 동래에서 시험 재배를 했다.
고구마는 역시 따뜻한 남쪽에서 키워야 했던 것일까? 시험 재배에 성공한 강필리는 1766년 고구마 재배법을 담은 '감저보(甘藷譜)'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렇게 해서 남해안을 중심으로 고구마 재배가 시작됐다.
고구마를 위해 평생을 건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고구마는 따뜻한 남쪽의 일부 지방에서만 재배되었을 뿐 북상하지 못했다. 여기에 김장순이 등장한다. 김장순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구제해 줄 고구마를 어떻게 하든지 중부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마침 전라도 보성에서 9년 동안이나 고구마 재배를 연구한 선종한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둘은 힘을 합해 서울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했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하여 1813년(순조 11년), 김장순은 자신의 재배 경험과 선종한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감저신보'라는 책을 펴내기에 이른다. 이후 고구마는 중부지방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다.
서경창은 아무 지위도 없고 고구마를 심을 땅도 갖지 못한 가난한 양반이었다. 태어나고 죽은 해도 문헌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실학을 연구하면서 최대의 과제로 식량문제 해결에 온 힘을 다했다. 그가 구황작물인 고구마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그는 종래의 고구마 재배와 관련한 여러 가지 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고구마의 파종 시기, 씨고구마의 소요량, 줄기의 선택과 심는 시기, 그리고 착생 부위 등에 관해 과학적으로 저술한 '종저방(種藷方)'이라는 역작을 내놓는다.
또한 그는 고구마를 전국에 걸쳐 보급하는 데도 관심을 가져 북쪽지방의 가난한 백성들도 고구마의 혜택을 받도록 하자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마침내 전국적인 작물이 되다
다음 차례는 조선 최대의 농학서인 '임원경제'를 지은 농학자 서유구(1764-1846)이다. 그는 일찍이 농학에 관심을 가졌고, 나중에 벼슬이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농서를 저술했다. 1834년에 그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그해에 전라도 지방에 대흉년이 들었다.
이에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좀더 널리 확산시켜 활발하게 재배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신보'에다 중국과 일본의 농서를 참조해 '종저보(種藷譜)'를 짓는다. 동시에 고구마 재배 농가에서 씨고구마를 구해 모든 고을에서 이를 재배토록 했다. 서유구에 의해 고구마는 남쪽 거의 모든 지역으로 전파된다.
이런 숱한 노력의 결과 1900년대 초 고구마는 그야말로 전국적인 작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16세기 말 선조 때부터 고구마 도입이 시도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무려 3백여 년이 흐른 후였다.
1824년에서 1825년 사이에 관북에서 처음 들여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감자가 얼마 안지나 양주, 원주, 철원 등지로 퍼져 수십 년 내에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고구마는 알다시피 탄수화물이 많다. 또 저장을 해놓으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효소가 작용해 매우 단맛이 난다. 이 때문에 구황작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15℃ 이하가 되면 성장이 멈추고 성장하는 동안 평균 22℃의 온도가 유지되어야 하며, 일교차가 크고 물이 잘 스며드는 땅에서만 자라는 등 재배법이 까다로웠다. 이 때문에 고구마는 쉽게 전파되지 못했다.
그나마 뜻있는 양반들, 바로 실학자들의 수백 년에 걸친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고구마의 토착화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고구마에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고자 했던 숱한 선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모닝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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