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
19일(월)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 입력날짜 : 2010. 07.17. 16:38
우남 이승만 박사와 몽양 여운영의 추도식이 같은날 치러진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 이 19일(월)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도식은 김문수 경기도지사,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유족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최재분 장로(신앙세계 발행인)의 기도,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의 특송, 김삼환 목사의 설교, 고인의 말씀(육성녹음), 경기도지사의 추도사에 이어 분향 및 이인수 박사의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된다.

우남 이승만박사(1875.3.26~1965.7.19)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전단을 배포했다가 이로 인해 징역 7년형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 을 저술했다.

‘독립정신’ 에서 국제간의 외교와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우남 이승만박사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몽양 여운형선생 63주기 추모식

조국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선생 63주기 추모식' 이 19일(월) 11시 강북구 수유리 묘전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여철연)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손용호 서울북부보훈지청장,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관련단체장과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및 유족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전창일 기념사업회 이사의 경과보고, 여철연 기념사업회장의 식사, 손용호 서울북부지청장,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전 국회의원의 추모사, 봉도가에 이어 여인영 대구중공업회장의 유족인사와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또한 추모식에 이어 오후 2시부터 서대문역사공원 내 독립관 강당 에서 몽양 서거 63주기를 맞아 “몽양 여운형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한 반론”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몽양(夢陽) 여운형선생(1885.4.24~1947.7.19)은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08년에는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1918년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우리들 소식’ 을 발행했으며, 8월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 2.8독립선언을 촉발케했다. 또한 국내에 김철, 선우혁 등을 파견, 국내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도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3.1만세운동의 분위기를 높여나갔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20년 조국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 조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문제가 부상하자,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고,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했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였으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 조국광복을 준비했고,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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