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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과 '666'
  • 입력날짜 : 2013. 01.15. 15:12
1992년은 시한부 종말론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 해 시한부 종말론은 자신들이 예언한 날이 지나자 조용해 졌다.

요즈음 인터넷상에서 ‘베리칩’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베리칩(VeriChip)’은 ‘베리피케이션칩(Verification Chip)’의 약자인데 ‘확인 칩’이란 뜻이다. 이것은 사람의 몸속에 이식한 각자의 정보를 담은 좁쌀만 한 칩을 말한다.

이 칩에는 각자의 정보를 담은 메모리와 안테나, 배터리가 들어있는데 배터리는 사람의 체온에 의해 충전된다고 한다.

이 ‘베리칩’은 1990년대 후반에 잃어버린 애완동물을 찾기 위해 동물 피부 속에 넣기 시작했는데, 2001년에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에게 이식하기도 했다.

미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해 통과된 의료보험법에 따르면, 오는 2013년 3월까지 모든 미국 시민이 아 ‘베리칩’을 받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베리칩’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받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 베리칩을 받고 안 받고에 따라 사람의 구원이 결정되는 듯이 야단이다.

구원은 베리칩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터넷상에서는 계속해서 베리칩과 666 논쟁이 격렬하다.

요한계시록은?

요한계시록은 성경 가운데 가장 난해한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1:1). 그리고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1:3).

요한계시록은 감추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그 어디에도 이 말씀은 어려워서 읽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읽고, 듣고, 행하라고 권면한다.

사실 1장 3절에 나오는 읽고, 듣고, 행하는 것은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교회는 이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행할 때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계시이기에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처음 받았던 소아시아 7교회는 요한의 글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내하며 죽도록 충성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었다.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종말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 종말이 시간의 마지막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시간의 마지막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약속하셨고, 성취하시는 ‘궁극적 일들(the ultimate things)’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의 끝 지점에서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등의 문제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말’ 의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건은 그것이 꼭 예수님의 재림 직전이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말’의 현상이다.

종말은 바로 ‘궁극적 일들(the ultimate things)’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약속하셨고, 성취하시는 이 ‘궁극적 일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의 중심’이다.

계시록은 미래에 발생할 어떤 일에 대한호기심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 앞날을 미리 기록한 글이라기보다는 종말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궁극적 일들’ 을 그려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를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에 따라 요한계시록 해석의 큰 원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다른 신약 성경 모두가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된다.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멸망은 초대 교회와 그들의 신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신약의 그 어느 성경도 이를 과거에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신약의 각 성경은 이 사건이 이제 곧 장래에 발생할 사건인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기록된 성경이 있다면, 적어도 이에 대하여 과거 사건으로서 한 번쯤은 언급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증거들 가운데 특별히 계11:8에는 그 결정적인 증거가 언급된다.

1 두 증인을 죽인성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요, ‘애굽’ 인데, 이는 곧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선지자를 죽인 이 큰 성이 바로 예루살렘임을 바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이방인들을 가리킬 때도 ‘소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배교한 이스라엘에 내려질 언약적 심판을 묘사할 때, 종종 ‘소돔’에 비유하고 있다(신29:23 사1:9).

그리고 마2:15은 이스라엘이 왜 애굽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이 아직 그대로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이, 성전이 배교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그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감람산 강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같은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즉 모든 신약성경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미래의 일로 예언하지 과거의 일로 회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계시록과 모든 신약성경이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교회들에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이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는 옛 언약 백성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의 가장 큰 원수는 로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옛 언약 백성, 유대인들이었다.

사도행전에도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자였고, 나중에 바울의 전도에서도 그를 가장 훼방한 무리는 어김없이 유대인들이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핍박이 절정에 도달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교한 옛 언약 백성에게는 심판을 선포하시고 핍박 가운데서도 신실한 교회에 대해서는 위로를 전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참된 신자들이 읽고 두려워할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1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성경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멸망, 고난의 종말이 아니다.

오히려 승리의 주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는 희망의 종말이다. 생지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낙원으로 회복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다.

짐승이 표를 받게 하는 이유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짐승 두 마리가 나타난다.

1-10절까지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타나고, 11-18절에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타난다. 먼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를 상징한다. 성경에서 바다는 이방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이방 세계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것으로 로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타난다.

성경에서 땅은 거룩한 땅,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가나안땅에서 사는 유대인들을 나타낸다. 그래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며, 유대주의자들이다.

앞서 설명한 것 처럼 초대교회를 가장 핍박한 자들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며, 유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을 요한계시록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16절에 의하면 모든 자에게 표를 받게 했다고 한다.

이 짐승은 거짓 선지자 곧 옛 언약 백성의 지도부였던 산헤드린이다. 이 산헤드린이 유대인들의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주었다. 그런데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실제로 베리칩이나 바코드를 주는 것일까?

짐승이 사람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인을 치신 행위를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께서 14만4000명에게 그 이마에 인을 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이마에 혹은 오른손에 인을 치신다는 것은 첫째, 언약 백성이 생각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전심으로 순종하고 있다는 표이다(신 6:6-8).

둘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복주시고 보호하시며 보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이다(겔 9:4-6).

이 하나님의 인은 구체적으로 언약의 말씀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이시다(엡 1:13-14). 땅의 짐승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인을 패러디,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한 것이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짐승의 우상 곧 성전과 회당에 충성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즉 산헤드린의 교리와 통치방식이 짐승이 사람들에게 준 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개인 신용카드나 바코드 같은 상품코드와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허황한 이야기인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경제를 장악하고 통치하게 될 것인데, 그때 성도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경제제재 수단이 바로 짐승의 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짐승의 표는 실제로 컴퓨터 칩과 같은 것, 베리칩을 이용해 사람의 몸에 직접 삽입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성도들도 어쩔 수 없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됨으로써 배도하게 되는 무서운 때가 올 것이라고 하면서 순진한 성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러나 본문의 짐승은 바다짐승이 아니라 땅의 짐승이다. 즉 바다짐승으로 나타나는 세상권세인 로마제국이 아니라 배도한 언약 백성의 지도자였던 산헤드린이다.

그들이 준 표는 경제활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의 거짓된 교리와 거짓된 교회질서였다.

그렇다면 17절에 나오는 ‘매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17절은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짐승의 표는 매매를 위한 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신분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산헤드린이 성전과 회당에 속한 유대인들에게만 매매할 수 있도록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도록 제재를 가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7절에 언급된 ‘매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경제활동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매매’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 2에 ‘사서’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모두 실제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구매하는 것을 뜻한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은 주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는 말씀을 들었다.

성도들이 이것들을 산다는 것은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서 ‘매매’는 한마디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55장 1절3에서 선지자는 두 번 ‘사라’는 말을 한다.

선지자가 사라고 한 것은 포도주와 젖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 곧 주님의 언약 복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에서 ‘매매’라는 말이 경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사람들에게 표를 주고, 그 표가 없는 사람들은 매매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산헤드린이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결코 경제적 제재를 가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종교적인 제재를 가한 것인데, 산헤드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을 성전과 회당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고, 심지어 출교시킨 것이다.

2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짐승의 표와 ‘매매’ 금지 조치는 용이 성도들을 미혹하여 타락시키고 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기 위한 수단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부모가 산헤드린을 두려워하였던 것처럼,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은 산헤드린의 조치를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산헤드린의 교리와 통치로 돌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 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산헤드린의 거짓된 교리와 사도의 참된 복음을 비교하는 것이다.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성전과 희생제사와 제사직분을 다 성취하셨다고 말하면서 유대인 성도들에게 다시 옛 언약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면한다.

반면에 산헤드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성전과 모세 율법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약의 복이 없다고 미혹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은 사도들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여지없이 박해하고 출교했다. 이 산헤드린의 가르침에 미혹되고 박해와 출교를 두려워한 신자 중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나 산헤드린과 회당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짐승이 준 표의 의미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666이라는 숫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666을 네로 황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네로 황제를 히브리어로 쓰고 그것을 히브리어 숫자로 대치하면 666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래서 666을 네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은 요한계시록이 주후 9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로는 주후 68년에 죽었다. 즉 그들의 말 자체에 모순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네로의 때가 아닌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666이 가리키는 것은 약 20년 전에 죽은 네로하고 하니 모순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요한계시록이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고 666이 네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면 연대적인 모순은 없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맥상에 모순이 있다. 666이 나타나는 본문에서 짐승은 바다의 짐승이 아니라 땅의 짐승이다.

즉 이방의 권세자가 아니라 언약 백성들 가운데서 나온 거짓 선지자들, 배교한 종교 지도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666이 네로 황제를 나타낸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면서 ‘지혜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 즉 짐승의 수를 세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진실로 총명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그러므로 이 짐승의 수인 666은 성경 자체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6은 태초부터 짐승과 사람과 관련을 맺고 있다. 짐승과 사람은 모두 창조의 6일째에 창조되었다. 그리고 7일 중 6일은 사람과 짐승에게 노동하도록 주어졌다(출 20:8-11).

히브리 노예는 7년째 자유의 몸이 되기 전 6년 동안 속박되어 있었다(출 21:2). 또 모세는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위해 6개의 도피성을 마련했다(민 35:9-15). 그래서 성경에서 6은 상징적으로 사람의 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666은 600+60+6이다. 600은 6이라는 숫자에 10*10을 한 것이고, 60은 6이라는 숫자에 10을 곱한 것이다. 성경에서 10은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666은 사람의 수인데, 가장 완전하고 가장 강렬한 사람의 수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666은 결코 777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6일째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 쉬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날을 주의 날로 정하셨다.

그래서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이다. 그래서 소위 777은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수인 반면에 666은 가장 완전한 사람의 수이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의 수는 가장 완전한 666일 뿐, 결코 가장 완전한 777 곧 하나님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6(혹은 600)과 관련된 숫자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사람과 그 행위를 상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블레셋의 골리앗의 키는 6규빗과 한 뼘(삼상 17:4)이었고, 그가 언약 백성을 죽이기 위하여 들고 나온 창날의 무게는 600세겔이었다(삼삼 17:7).

이 숫자는 골리앗이 참으로 하나님과 그 백성의 대적자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골리앗이 입은 비늘 갑옷은 그가 뱀의 후손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삼상 17:5).

또 다른 예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이다.

그 신상은 원수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언약 백성을 미혹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그 신상의 크기가 세로 600규빗, 가로 6규빗이었습니다(단 3:1). 바로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총명한 자는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를 세어볼 때, 이 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언약 백성을 미혹하는 자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예는 솔로몬에게서 볼 수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은 귀한 왕이다.

그러나 그 열왕기상 10장을 전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솔로몬은 왕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율법, 즉 금과 말과 아내를 늘리지 말라는 것을 번갈아 가면서 어긴다(신17:16-17, 왕상 10:14-11:8). 이런 솔로몬의 배교에 대한 소개의 첫 구절에 666이 나타난다.

열왕기상 10장 14절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솔로몬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떠나는 부분에 나타나는 것이 솔로몬이 한 해에 세입금으로 거둬들인 금의 무게이다. 666 달란트이다.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배교한 자가 되었을 때에 그를 지칭하는 것 중의 하나가 666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름 받았고,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산헤드린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거절하게 되자, 이제 그들이 짐승의 수, 사람의 수인 666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언약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라 짐승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요한계시록 13장은 말해 준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을 두렵게 하는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책이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의 확실함을 보여주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의 확실함을 믿고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참된 교회에 붙어있는 자들은 교회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도움을 따라 위로 가운데 살게 된다.

말씀에 신실하신 삼위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성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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