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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칼럼] 백의정승 매력에 취하다
김형석/컬처 크리에이터(Culture Creator), 前 거제문화예술회관 관장
  • 입력날짜 : 2012. 06.13. 12:14
현대판 사문난적(斯文亂賊) 종북, 색깔 논쟁으로 시끄러운 도시를 벗어나,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주최한 기호유학 인문학포럼 ‘인문학 이야기가 있는 1박 2일 충남명가 탐방’을 다녀왔다.

논산의 명재고택, 종학당, 죽림서원 등을 문화답사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이 왜곡한 우리 선비들의 인간적 매력과 시대정신에 푹 빠진 여행이었다.

고풍스러운 한옥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담은 과학적 실용주의 건축도 좋았지만, ‘백의정승(白衣政丞)’ 명재 윤증 고택을 지키는 종손의 이야기에서 명문가의 가풍, 예의, 덕행, 적선(積善)에 취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있는 감동스토리였다.
[사진] '나눔'과 '소통'을 실천한 윤증 선생의 명재고택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명재고택에는 윤증 선생이 살지 않았다. 아들과 제자들이 초라한 집에서 기거하는 것을 보다 못해 돈을 모아 지은 집이지만 생전에 명재는 "과분하다"며 살던 집을 떠나지 않았다.

시골에서 조상의 가격(家格)과 가훈을 지킨다는 긍지와 자부심의 종손은 고구마를 싫어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부엌에서 머슴들과 겸상을 하고, 부잣집 호의호식과 거리가 먼 생활을 훈육 받아 한 끼 식사는 꼭 고구마를 먹었기 때문이란다.

천석군이었던 집안은 가을 추수한 나락 가마니를 곧바로 창고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바깥에 일주일 정도 야적해 두었다.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밤에 몰래 가져가도 된다는 배려의 기간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지는데, 명재고택의 굴뚝은 1미터 정도 높이로 나지막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이웃을 의식했기 때문이란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의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기에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명재 윤증 선생의 공동체 정신은 양잠을 금지했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는 양잠업은 당시 고소득 업종이었는데, 부자 양반인 윤씨 집안이 양잠에 진출하게 되면,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살 것이 없어진다는 이유라고 했다.
[사진] 가문의 전통이었다는 '문화나눔' 잔치 이벤트, 연희에 대한 추억으로 종손이 주최한 고택 음악회. 무대로 활용된 안채에 윤씨 집안의 서예가가 기증했다는 歸隱虛淸(귀은허청), 즉 '은둔하며 마음을 비우고 맑게 지낸다'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외에도 고택 곳곳에는 청백리가 좋아할 글귀들이 눈에 읽힌다. 虛閑高臥(허한고와), 淸白傳家(청백전가), 離隱時舍(리은시사), 桃源人家(도원인가)...

새로 부임한 벼슬아치는 지역 어른인 명재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음식 대접을 받으면 동구 밖의 느티나무 근처에서 먹은 꽁보리밥을 토했다는 일화도 전해 주었다.

현대까지 고택이 존재하면 그 집은 훌륭한 인물과 역사가 있는 집이다. 역사의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명문가 집안이란 뜻이다. 동학혁명, 6·25전쟁 등 난리를 겪으면서 이웃사람들의 인심을 잃고 부도덕했던 고택들은 대개 불에 타거나 훼손되었다.

명재고택의 안채 입구 처마에 불탄 흔적이 있었다. 전라도 고부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반봉건, 반외세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시작된 동학 혁명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의 양반집은 다 불태워졌다. 불붙은 명재고택을 지킨 것은 주변의 은혜 입은 백성들이었단다.
[사진] 죽림서원(당시, 황산서원)은 정적(政適)을 죽여 침묵의 제국이 된 조선의 '사문낙적' 서막이 오른 곳이다. 1653년,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이 친구 윤선거(윤증 선생 부친)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다. 송시열은 주희와는 다르게 '중용'을 해석한 윤휴를 주자학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도적과 같은 존재, 즉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조선시대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4대 당파 중, 명재 윤증 선생은 스승 송시열의 노론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귀거래(歸去來)한 소론의 영수로 지금으로 보면 제1 야당 지도자였다.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던 명재에게 임금은 우의정을 제수해도 벼슬을 거부해 ‘백의정승’으로 불린다. 명분을 중시한 선비정신은 경상도 남인을 배제한 지역차별 정권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를 올려 현실정치에 참여했으며 시문집 ‘명재유고’를 남겼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청빈을 실천한 명재는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서민들의 생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집안을 단속했다. 문중 자제를 교육하는 사립학교인 ‘종학당’에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제사, 가례 등에 검소함을 강조한 유훈을 남겼다.
[사진] 향교가 국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다. 논산의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의 문중 교육기관인 종학당의 정수루. 윤증 선생과 백부인 윤순거가 종중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 곳에서 배출된 대과 급제자만 42명에 이른다는데, 한 장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 40여 명 이상 배출된 사실은 조선 500년 역사에 처음이다.

한국의 권불오년(權不五年), 정권 하산길의 권력자들은 비리로 감옥 가거나 장관 등 요직을 지냈어도 재벌 기업에 취직해 장사꾼 밑에서 굽실거리며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닌다’는 예미도중(曳尾塗中)의 추한 모습이나 보인다. 재벌들도 돈이 된다면 서민 먹거리까지 침범하는 상도(商道)가 실종되어 인심을 잃는 세상!

도덕성에 문제가 많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 양극화, 재벌의 탐욕, 불공정사회, 지역주의 등 대한민국 갈등의 해답은 명재(明齋) 선생의 삶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정미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오정미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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