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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 거제도를 복원하다
  • 입력날짜 : 2012. 03.02. 22:09
박문길 SUNFORCE 연구소 소장/ 관세사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약 70여년간 왜구의 창궐로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당시 거제도(기성현)는 일본 왜구의 빈번한 침범과 약탈로 국방력이 미치지 못하고 주민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고려말부터 공도화(空島化)로 주민과 현을 거창군 가조지역 등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세종실록).

거제도는 거창과 제창현으로 통합되니 참으로 통분한 일이었다.

나라를 잃어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둔 것처럼 거제의 현아가 거창군에 합병되어 임시로 명맥만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6.25 전쟁때 피난민들이 거제로 몰려왔듯이 거제도의 주민들은 왜구의 침략을 당할 길이 없어 정든 섬을 떠나 봇짐을 이고지고 북으로, 북으로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이 거창군 가조지역 등에 정착하게 된다.

왜구의 침범과 참혹한 거제의 역사

왜 멀고 산골 깊은 추운 곳까지 보냈을까. 인근 남해안의 지역으로 보내봐야 그 지역에도 왜구의 침범이 빈번하니 아예 깊은 산속으로 보냈으리라.

거제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사시대(백악기 중성대)에는 공룡이 살았으며(외도, 장목면 관포 등) 지석묘, 고인돌, 패총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문화발달이 육지에 뒤지지 않았고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개국중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은 사등성이 도읍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뒤 신라에 귀속되어 677년(문무왕17년)에 상군(裳郡)이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거제라는 이름은 757년(경덕왕16년)에 거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성종때 기성현으로 다시 바뀌었다.

거제도와 세종대왕과의 인연

세종대왕(1397~1450)은 우리나라 역사상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가장 위대한 성웅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은 거제의 옥포대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세종대왕과 거제도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관계로 세종대왕의 거제와의 인연을 살펴보려 한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은 민본주의와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두고 정치, 경제, 문화, 국방 등 다방면에 휼륭한 치적을 쌓아 민족문화의 창달과 500년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재위기간 32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음이 이를 증명한다. 백성이 쉽게 소통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를 발명하였고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를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김종서, 최윤덕 장군을 시켜 압록강, 두만강의 4군6진을 개척하여 북방 영토의 경계를 확대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땅으로 기록하였다.

남쪽으로는 왜구의 빈번한 침략에 1419년 이종무장군으로 하여금 전함227척, 1만7285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선박129척과 1939가호를 불태우고 적114명을 참수하고 잡혀갔던 우리 포로들을 구출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출전 전 “대마도는 본래 우리의 땅인데(신라시대 경상도, 고려시대 대마도주에게는 대마도 구당관이라는 고려관직을 제수) 다만 궁벽하게 막혀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둑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우리 땅을 침범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며 우는 일이 해마다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종무장군의 출전지는 주원방포(周原防浦)로 거제도에 딸린 추봉도에 있는 추봉리이다.

당시(거제현, 기성현)에는 한산도, 비진도, 추봉도, 산달도, 매물도, 홍도 등은 거제도에 딸린 부속섬이었고 이는 통영시에도 인정하고 있으며, 통영시청 홈페이지 통영시 연혁에도 그 당시 거제도의 땅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럼 역사적 사실을 볼 때 한산도의 한산대첩과 대마도 출전지 추봉도도 거제땅인 것이다.

세종대왕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진압하고 왜구를 잠재운 뒤 대마도 정벌 3년후 1422년(세종4년) 제창현(지금의 거창군)에 피난 간 거제의 주민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조치하였다. 세종대왕은 피난 간 거제의 백성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거제도의 복구와 유비무환의 일환으로 고현성의 축조를 지시하고 거제현의 이름을 찾아 주었다. 신라 경덕왕때 지어진 거제현을 다시 복원한 거제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현성의 축조는 그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볼 때 대단한 역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거제도의 주민은 얼마되지 않으니 사천, 곤양, 진주, 진해, 심지어는 경북청도에서 까지 2만여명의 육지인력을 동원하여 9년만에 고현성을 낙성하였다니 거제도의 중요성을 세삼느끼게 되며 거제의 후손으로서 세종대왕의 은혜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 이렇게 어렵게 만든 성은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선조24년(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황윤길정사와 김성일부사의 귀국보고에서 서로 상반된 보고에 전쟁준비를 소홀히 하고 동인, 서인의 당파싸움으로 2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거제의 고현성은 무참히 파괴되고 함락된 것을 볼 때 지금이나 옛날이나 유비무환과 국방은 사람의 심장과도 같다 할 것이다. 그나마도 다행히 이순신장군의 옥포대첩으로 위기일발의 거제도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보국, 은혜, 호국, 자유의 땅, 거제도

지금까지의 거제의 역사를 되돌이켜 볼 때 거제도의 땅과 민심은 나라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으며 품기도 해왔다. 그래서인지 흔히 거제도를 보국, 호국, 은혜, 자유의 땅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고려때는 의종왕의 폐왕성유배지로, 정과정곡의 정서,조선시대 때는 우암 송시열 영의정, 김창집 영의정, 최숙생, 정황, 김진규, 이유원 등500여명의 유배지였으며, 식솔, 노비를 합하여 1000명이상이 귀양지로, 오아포(지금의 가배)에는 우수영의 해군기지였고, 한산대첩, 옥포대첩의 승전지로서도, 6.25전쟁때는 20여만명의 포로와 피난민을 품은 고장이다.

현재 ‘혹성탈출’을 만든 할리우드제작진은 이를 소재로 수백억원을 들여 흥남철수작전의 영화제작을 한다고 최근 밝힌 바 있다.

지금은 또한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양대조선소가 세계1위로 우뚝 솟아 국가에 보국하고 지역경제를 살리고 있다.

결어

현재 세계의 패러다임은 해양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만큼 바다가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거제도가 해양대국으로 가는 교두보의 지리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음은 큰 보물이라 할 수 있다.

해저광물, 해저에너지, 해상풍력, 국제수송로, 관광, 수산 등 무궁무진하며 영토(영해)를 확장하고 자원을 확보하려는 국제간의 경쟁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에는 필히 인접 국가간의 마찰이 생기게 마련이니 국방력의 확보는 필수적이라고 보아야한다.

나약한 평화는 굴종이며 평화는 말로만 읖조린다고 평화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제주의 해군기지 건설만 보더라도 그렇다.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 국가의 지원과 혜택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받은 곳이다.

1조원이 넘는 국비지원과 국책사업을 끝내 제주도가 반대한다면 거제에 해군기지를 유치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5만톤 크루즈 유람선이 들어오고 일자리가 확대되고 관광이 활성화 된다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거제가 한다면 그래도 제주는 반대할까?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 우리도 대마도를 우리 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여야 하며 한산도, 장사도, 추봉도, 매물도 등도 거제의 섬이었다는 사실을 전시민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강한 국방을 가져야 만이 영토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

거제는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켜온 보배의 섬으로 거제시민은 더욱 단합하여 잘 가꿔야 할 것이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 거제의 은인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나란히 세우는 것이 어떨까?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모닝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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