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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기행] 이탈리아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찾아서
수필가 윤혜영 geo0511@hanmail.net
  • 입력날짜 : 2011. 12.09. 16:42
오전 11시 40분, 베로나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산타루치아 역.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부터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지 않은 채 화강암 열주 옆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세 칸 아래의 계단에서는 십대 후반의 금발머리 연인이 주위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소년의 허벅지에 흰색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소녀가 올라탄 자세다. 구릿빛 다리가 탄력 있고 싱싱하다.

당차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 그 곁에서 나는 껍질을 벗은 민달팽이 같은 기분이 든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안을,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허락하소서 (Reinhold Niebuhr)

떠나오기 전부터 주술처럼 곱씹던 문장, 간절히 기도했으나 사랑은 화무십일홍, 화양연화와 같이 한때 아름다웠다가 산산이 흩어져 소실되는 감정의 사치에 다름 아닌 것들이었던가. 우리가 함께 나눈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였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물을 억누르며 한국을 떠나왔다. 유럽의 여름 음악축제를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무의식적으로도 떠오르는 얼굴을 의식적으로 억누르려 노력하며 떠돌다 이탈리아 베로나까지 흘러왔다. 죽음으로 종결된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의 행적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수로를 따라 산책하기 좋은 베로나 풍경

산타루치아 역을 출발한 열차는 북쪽으로 1시간 30분을 달려 베로나 Porta Nuova역에 도착했다. 유인 락커에 얼마간의 유로를 집어주고 배낭을 맡긴 후 11번 버스를 타고 시내중심 Bra광장에 내렸다. 도보 하루일정으로 충분히 관광이 가능하다는 베로나는 아담하였다. 이탈리아 Rosso석회암으로 지었다는 붉은색 집들이 고색창연하였다.

가장 먼저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인 아레나(Arena)를 찾았다.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오페라 '아이다'공연이 열린다. 로마 콜로세움과 카푸아(Capua)에 있는 원형경기장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 큰 규모인 아레나는 1세기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한번에 2만 5천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돌로 된 대형공연장을 둘러 보다가 그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엉덩이를 통해 느껴지는 돌의 냉기가 서늘하다. 둥근 객석은 허기진 위장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티켓센터에서 티켓 6장을 예매해두고 일행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갔다. 매표소 맞은편에서 왼쪽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드니 중국식당이 보였다. 며칠간 계속되는 피자와 햄버거의 식사에 이골이 난 상태라 모두들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파두부와 계란탕, 볶음밥과 딤섬 몇 개를 시켜 6명이 배불리 나눠먹고 한화 5만원 가량을 지불하였다. 언제 다시올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오면 꼭 이곳에서 밥을 먹자고 간판을 유심히 살폈다.
▲ 중세의 느낌을 간직한 에르베 광장


저녁의 오페라 공연까지 시간이 남아 중세의 정취를 간직한 에르베 광장을 둘러보고 줄리엣의 집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수 집안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반대에 부딪치다 주인공들이 죽음으로 사랑이 종결(혹은 완성)되는 내용이다.

한낮의 열기를 상쇄시키려는 듯 시원하게 쏘아올리는 분수가 멋진 에르베 광장(Piazza Erbe)에는 노천시장이 열려 과일과 빵, 치즈와 같은 식료품들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분수에 둘러앉아 하릴없이 발을 굴리고 있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와 권태가 묻어나는듯 하였다.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를 쪼아댔다. 야트막하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 카펠로(Cappello)거리 27번지에 있는 까사 디 쥴리에따(Casa di Giulietta)에 도착하였다. 소설에 나오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13세기 귀족의 집을 발코니를 만들고 복원하여 전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통로의 벽에는 포스트잇과 낙서로 원래의 색을 알 수 없게 어지러운 낙서로 가득하였다. 언어는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발코니에서는 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나와 퍼포먼스를 하는데 줄리엣 역을 맡은 것 같았다. 좁은 마당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지러웠고 마당 한켠에 청동브론즈로 줄리엣의 모형을 만들어 세워 두었다. 가슴부분만 손때를 타 반질반질한 것이 가슴을 만지며 사랑을 빌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같이 가슴에 손을 대고 사진촬영을 하였다.
▲ 줄리엣의 집


그다지 볼거리가 없는 이곳에 사랑이라는 실체도 없는 감정을 쫓아 모여든 군중들을 보고 있노라니 '사랑'의 맹목성에 조금은 기가 질리는 느낌이 든다. 나 자신도 줄리엣 상의 가슴을 만지며 영원한 사랑을 욕심부리고 싶었으나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해버렸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노력으로 지속되는 감정도 아니고 한쪽에서만 잘한다고 되는것도 아니니 차라리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은 것일까? 줄리엣의 집을 나와 아디제 강가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였다.
▲ 원형경기장 아레나


8시가 되어 공연장인 아레나로 향하였다. 원형객석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밤인데도 날씨는 굉장히 무더웠고 목이 타 아이스박스를 들고 호객하는 상인에게 아이스크림과 생수 한 병을 샀더니 한화 1만원이 넘는 금액을 요구하였다. 밖에서 미리 준비해오지 않은 내 무지를 탓하며 값비싼 물을 마셨다.

여름 해는 길다지만 8시가 넘자 주위가 조금씩 사그라지며 군중들의 실루엣이 어스름에 녹아들었다. 공연관계자들이 관객들에게 작은 초를 하나씩 나누어주었고 심지의 불꽃을 객석에서 객석으로 나누며 불을 밝혔다.

촛불에 의지해 오페라를 관람하는 독특한 이벤트, 촛불이 완전히 꺼지면 무대의 불빛에 오롯이 의지해 공연에 빠져들게 된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이집트의 무장 라다메스와 포로인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의 사랑, 라다메스를 사랑하는 이집트 공주 암메리스의 삼각로맨스, 그리고 죽음으로 끝을 맺은 사랑.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아이다도 사랑의 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목숨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것은 풀지 못할 난제인가. 연인들은 어찌하여 이토록 모호한 '사랑'이란 감정으로 죽음까지 불사하는가.

이 감정은 비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마약 같은 현혹일까? 결과가 뻔히 보이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기 위해 사랑에 빠진 이들은 종종 무리수를 던진다. 지속가능하리라 믿었던 감정들이 소모되면 비로소 추악한 현실과 베일을 벗은 초라한 연인이 보이지만 눈이 먼 연인들은 쉽사리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떠난 사랑과 함께 소실되었으리라 믿었던 심장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또다시 소생하게 된다. 예전의 기억은 깨끗이 잊고 또다시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심장을 파먹히지만 다음날이면 심장이 재생되어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된다. 사랑도 이와 같다. 지상에 있는 한 사랑의 천형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아둔함인지 인간의 아름다움인지 알 수가 없다.
▲ 베로나 풍경


공연은 새벽 1시 남짓하여 끝이 났고 일행들과 공연장 밖의 까페에서 모히또를 한잔씩 마시며 다른 도시로 떠나는 새벽기차를 기다렸다. 첫 기차는 5시이다. 공원의 벤치에서 융단같은 밤하늘을 이불삼아 배낭을 베개삼아 풋잠을 청했다. 별이 총총한 여름밤은 방랑자의 노숙에 따뜻하고도 쓸쓸한 여운을 준다.

유럽의 오페라 축제는 이탈리아 베로나, 오스트리아 빈, 브리겐츠, 스코틀랜드 등에 이르기까지 전유럽에 걸쳐 7월과 8월 사이에 계속된다.

베로나 여행정보

가는 길 : 밀라노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베니스에서 기차로 1시간30분 인스부르크에서 3시간 30분, 뮌헨에서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기차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 오페라 축제와 관련한 정보는 베로나 관광청(www.tourism.verona.it)이나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사이트(www.arena.it)를 참고한다.

추천코스 :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 중앙역 - 아레나(브라 광장) - 베키오성 - 마치니 거리 - 줄리엣의 집 - 에르베 광장 -아나스타샤 교회 - 산 피에트로성과 로마 극장 - 포르타 누오바 중앙역.

베로나는 하루정도를 투자하면 충분히 둘러볼만큼 작은 도시이다. 기차역에서 브라나광장 아레나까지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아레나를 본 다음 줄리엣의 집까지는 5분 거리다.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걷다보면 에르베 광장이 나온다. 아디제 강가에 위치한 '산 체노 마조레'교회는 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며 13세기에 건축된 '산타 아나스타시아'교회, 스칼리제리 집안의 저택이었다가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Vecchio) 성 등이 유명하다.





오정미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오정미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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