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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시론]아프간 인질사태에 대하여
  • 입력날짜 : 2007. 08.08. 12:25
강학도(거제YMCA이사장)
2007년8월6일 밤(한국시간) 미국 조지w부시대통령과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간의 정상회담의 결과는 예상대로 인질석방을 위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지난해 미국 여기자의 인질로 아프간에 잡혀있던300여명의 아프간 여 반정부 죄수(포로)석방 교환 때와는 전혀 다른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제 아프간의 탈레반에 인질로 잡혀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목숨은 순전히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9월11일 전 세계를 경악시킨 9.11동시테러, 그리고 부시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선포로 지금의 상황이 예견되었다.

9·11 동시테러가 발생한지 9일 만에 피의 복수전쟁 “테러와의 전쟁” 서막이 올랐다.
‘피의 보복전쟁’ 의 일차적 목표물은 아프가니스탄이었고 두 번째 타깃이 이라크 후세인정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9.11테러의 배후조종자로 알려진 오사마 빈라덴과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가 있음을 명분을 삼았고 이라크는 후세인정권이 대량살상무기와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라크는 순전히 부시정부의 추측에 의한 잠재적 위험요소가 침공의 이유였다는 셈이다.

냉정하게 보면 미국의 아프간침공은 9.11테러에 대한 보복응징차원이었고, 이라크침공은 석유전쟁이었음이 국제사회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어떠한 이유로라도 국제법상의 독립된 주권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며 침략적 만행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이러한 비등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의 침공을 감행한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1년 9.11테러 발생 9일 (2001.9.20)만에 의회 연설을 통하여 9·11 테러의 배후로 ‘오사마 빈라덴’을 지목하면서 이들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를 아프간 탈레반정부가 보호하고 있다고 단정하고는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알카에다 지도부를 미국 쪽에 넘기고, 아프간 내에서 운영하는 훈련캠프를 비롯한 테러 관련 시설을 영구히 폐쇄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탈레반지도부는 이를 거부한다. 탈레반 정권은 오사마 빈라덴을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하자는 역제안을 미 부시정부에 내놓게 되지만, 부시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6일후 인 10월7일 마침내 인도양에서 날아온 토마호크 미사일이 아프간의 메마른 땅에 폭탄세례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9·11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꼭 26일 만에 ‘항구적 자유’를 내건 피의 보복전쟁 시작된 것이다.
초반부터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막을 내린다.

미국은 피의 보복전쟁을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12월7일 탈레반의 심장부인 남부 칸다하르가 북부동맹군의 손에 넣으면서 탈레반 정권의 붕괴를 공식선언한다. 그리고 12월22일 78일 만에 카불에서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수반으로 하는 친미 아프간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참으로 전광석화 같은 피의 복수전이었다.

이후 우리는 국내 언론의 보도에 따라 아프간은 약간의 혼란은 있겠지만 이내 안정되어간다고 믿었다. 아프간의 탈레반에 대해서는 이들이 저질러 놓은 온갖 만행과 이슬람의 와히비즘(수니파의 극단적 원리주의)으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말살된 비민주적이고 반문명적인 독재정권으로 인식되었다.

미국에 의해서 자유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고 아프간 국민들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아프간엔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였고, 크게 위험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미국의 침략에 대해선 모든 것이 정당화 되는 듯 했다. 만약 이번 인질사태가 발발하지 않았다면 좀 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하였을 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론과 분위기가 아프간의 재건을 돕기 위한 선교봉사활동으로 이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교봉사활동이 수년전부터 행해온 활동이었음이 이를 잘 대변한다.
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벼락이었다. 23명의 외국 민간인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탈레반의 인질, 최후통첩, 2명의 인질살해, 그리고 남은 인질들에 대한 시시각각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으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상황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번 인질사건으로 우리 모두에게 아프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내전상황인지를 확연히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달라진 탈레반, 괴물 같은 “네오탈레반”의 등장을 보게 된 것이다.

예고된 등장 - 네오탈레반

2001년 12월 말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진 아프간 탈레반정부군의 패잔세력들은 혹한의 눈보라를 뚫으며 파키스탄의 험준한 산악국경지대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지구상에서 탈레반은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힘을 키우며 6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새로운 네오 탈레반으로 지금 세계인의 눈앞에 등장하게 되었다.

2001년 12월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검은 머릿수건이 사라졌다고 해서 아프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포성이 멈춘 뒤에도 아프간 주민들의 고달픈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프간은 하미드 카르자이 친미정부 수립 이후 6년간의 세월 동안 실로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국제사회는 쏟아 부었다.

이에 비해 국제사회의 재건·복구비 지원은 너무나 인색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 등이 지난 2002∼2006년 아프간에서 사용한 군사비는 약 825억달러에 이르는 반면, 같은 기간 재건·복구 예산은 군사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고작 73억달러에 불과했음이 이를 반증한다.

화려한 부활- 탈레반의 유일한 활동자금은 아편

그동안 일체 외부의 지원 없이 피폐해진 나라에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아프간 농부들의 유일한 수입원으로 아편용 양귀비 재배가 탈레반 정권 몰락과 함께 급증한 것은 당연했다.

탈레반정권 때에는 양귀비제배를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인데 2002년 3000 톤 정도로 추정되었던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은 불과 3년 만인 지난해에는 무려 6100톤으로 급증했다. 이는 전 세계 아편 생산량의 92%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아편 재배 면적이 급속히 늘게 되자 “하미드 카르자이”정부와 다국적군은 양귀비 제거를 위한 삼엄한 단속 작전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난과 끝 모를 점령과 수탈에 지친 주민들은 어느새 조직을 갖추게 되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탈레반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아편은 아프간의 석유로 불린다. 아프간 국민총생산(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편 농사는 탈레반 집권기에는 일체 금지됐다. 하지만 탈레반의 몰락 이후 아편 밭이 다시 부활했다. 이제 탈레반은 아프간 민중들의 일상에 일체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농부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오히려 탈레반의 지원으로 아편 추수에 전념하고 있다.
어제까지 금기시했던 것도 오늘은 허용된다는 달라진 탈레반의 모습에 아프간의 남부지역주민들 대다수가 탈레반 편으로 기울었다.

아편 재배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활동자금을 공급받고 있는 탈레반은 이제 이 아편문제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주민들을 탈레반의 든든한 우호세력으로 얻게 되었다.”는 알자지라 방송의 보도내용은 이들의 달라진 모습과 활동을 짐작케 하고 있다.
앞으로 아프간이 이라크와 더불어 제2의 베트남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국제사회는 우려 섞인 예견들을 내놓고 있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다.

지난 7월5일 아랍 뉴스채널 <알자지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 그들, ‘네오 탈레반’에 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미 중동미디어연구소(MEMRI)가 번역해 인터넷에 올린 17분30초 분량의 프로그램에서 위성통신 장비와 노트북 컴퓨터로 무장한 2세대 젊은 청년 탈레반의 활동 양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 6년의 세월이 흘렀고,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지신들은 이제 아프간의 해방군으로서 자신들의 적은 미국이며 동시에 미국을 도우는 나라 역시 적이라는 등식을 세우며 네오 탈레반은 돌아온 것이다.

<알자지라>방송이 돌아온 탈레반의 첫 번째 특징으로 그물망식으로 잘 짜인 조직과 지역별 통제력을 극대화하기위하여 만든 이동식 탈레반 사령부를 꼽았다. 남부 헬만드주 하자라지프트 지역 탈레반 책임자인 라흐마트 알라는 “지도부에선 항상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라고 명한다.

이교도들이 우리 지역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언제 어디든지 옮겨 다닐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고 말한다.

네오 탈레반의 두 번째 특징은 ‘점령군’과 맞선 최전선의 전투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매일매일 격렬한 교전이 불을 뿜는 전선에서 탈레반은 수십 명 단위로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철저한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다.

지역 사령부와의 교신은 최신 무선통신을 활용했고, 군사 전술 면에서도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다. 실제로 탈레반은 다국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기존엔 볼 수 없었던 노트복과 인터넷, PDA, 그리고 소형 터널과 참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프간은 오랜 전쟁과 내전으로 산에는 나무가 없고 길이 없으며, 강엔 물이 없다. 식량의 절대부족으로 극심한 기근에 직면하였다. 메마른 황무지에 문맹률이 85%, 그리고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구호와 지원이 전혀 없으므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탈레반은 미국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진 무장단체였다. 탈레반은 1979년 구, 소련이 친소 사회주의 정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프간 침공을 감행한 옛 소련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이 그 뿌리이며 실체다. 탈레반 초기 가담자들 대부분이 ‘무자헤딘’과 함께 처절한 전투에 나선 경험이 있는 전사들이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중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추가 흔들리자, 미국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단 2주 만에 이슬람 무장세력 지원을 결정한다. 1980년 카터 행정부는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예산으로 3천만달러를 책정했지만, 레이건 행정부 들어 천문학적으로 증액된다. 1985년 미 의회는 아프간 지원을 2억5천만달러로 늘렸고, 2년 뒤인 1987년엔 6억3천만달러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1989년 소련군 철수와 함께 아프간의 ‘매력’도 사라졌다. 미국이 내준 무기로 무장한 군벌이 창궐하는 이 땅에 애써 관심을 두는 이들은 없었다.
다만 탈레반의 ‘발육’과 ‘성장’을 도운 것은 미국이다. 직접으로는 파키스탄이 지원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향 하에 움직였을 것” 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무자헤딘’군의 10년간의 결사항전으로 마침내 막강한 소련군도 철수하게 되었다지만, 소련군의 철수 뒤에 온 것은 아프간의 평화가 아니라 피로 얼룩진 대소항전의 역사는 허망하게도 아비규환의 내전으로 바뀌게 된다.

소련이란 방패막이 없이도 용케 버텨내던 ‘나지불라 정권’은 1992년 타지크족 출신이 주축이 된 ‘무자헤딘’군이 카불을 함락, 입성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러나 기나간 13년간의 전쟁과 중앙정부의 몰락에 따른 권력 공백은 오히려 군벌의 발호로 이어지고 또다시 지리하고 끝없는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탈레반’(‘진리를 쫓는 사람들’)의 등장과 미국의 지원

이 때 등장한 것이 ‘탈레반’이다. 미국은 아프간에 친미정부가 필요했다. 중앙아시아에 러시아를 견재 할 친미 정부가 절실하게 필요한 미국은 탈레반을 통하여 친미정부를 탄생시킨다.

탈레반은 공식적으로는 1994년 국경근처 파키스탄의 난민캠프인 이슬람 종교학교에서 파슈툰족 젊은 청년학생들을 주축으로 창설하게 된다.
‘탈레반’이라는 뜻은 ‘학생 또는 진리를 좇는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1994년 10월12일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파키스탄 국경수비대의 포격 지원을 받은 탈레반은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의 전략 거점인 스핀 볼다크 지역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탈레반’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확실한 거점을 확보한 탈레반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그해 11월3일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를 이틀 만에 함락한다.

이듬해 2월 탈레반은 아프간 34개 주 가운데 9개 지역을 장악한다. 각 지역의 군벌들도 위세에 눌려 전투를 포기하거나 투항하기 시작했다. 군벌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적적관계로 발전하게 되면서 마침내 1996년 9월26일 탈레반은 아프간의 수도인 카불 입성에 성공한다.

이처럼 기나긴 내전의 끝이 ‘탈레반’정권의 탄생 배경이다. 그만큼 탈레반의 탄생과 등장은 난산이었다. 결국 미국의 지원으로 탈레반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무자헤딘 일원으로 소련에 맞섰던 오사마 빈라덴은 1989년 소련의 철수와 함께 고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간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정부가 미군의 걸프만 연안주둔을 용인하자 이를 반대하며 다시 출국 길에 오르게 된다. 수단으로 옮겨 본격적인 반제국주의 (반미, 반서구)운동에 투신한다. 결국 수단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오사마 빈라덴을 추방하게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을 거쳐 같은 무자헤딘 출신 의 군벌인 ‘하지 압둘 카디르’가 장악하고 있던 “잘랄라바드”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미국이 키워낸 무자헤딘 출신의 거물 테러리스트와 그 후예들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사마 빈라덴은 1996년 탈레반의 카불 입성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를 통해 그는 탈레반의 오랜 동지이자 영원한 ‘손님’이 됐다.

1994년 11월 탈레반이 칸다하르를 점령하자, 파키스탄 페샤와르 주재 미 영사관은 “적어도 소련의 침공 이래 아프간에 만연한 폭력과 정파 갈등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흐름으로 볼 수 있으며, 탈레반은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인 와하비즘(wahhabism (al-Wahabiyah-이슬람 원리주의))에 반대한다”는 매우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호감’의 배경엔 카스피 해 연안국가의 막대한 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해 아프간을 관통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레반과 미국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기이한 인연’은 1998년 8월20일 막을 내린다. 미국은 이날 테러범 소탕을 명분으로 아프간 파크티아주 자와르 지역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핏빛 결별과 피의복수전인 아프간사태의 서막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아프간의 미래를 점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아프간 남부지역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 같다. 낮에는 정부군이 번을 서지만 해가지면 탈레반의 세상으로 변했다고 외신은 보도한다.

이제 이라크의 반군 발호에 이은 아프간의 탈레반 발호는 제2의 베트남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는 국제사회의 매우 심각한 우려와 견해이다.
이모든 것이 오로지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 전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탈레반이 무고한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다.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행위는 그들이 아무리 정당한 전쟁을 수행한다고 주장해도 결코 정당화 될 수없는 명백한 반인륜적 범죄행위이며 테러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균형적인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의 형제가 2명이나 살해됐고, 벌써 20일을 넘기고 있다. 나머지 21명도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우리정부의 9시간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인질과 포로교환 요구를 거부했다. 미국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전쟁도 불사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동맹국의 생명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 냉담한 반응이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어제 밤에 있은 아프간 ‘하미드카르자이’ 대통령과 미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에게는 우리의 형제자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잔혹성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이들을 이슬람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일이 우선순위인지도 모른다.

탈레반이 인질을 살해하면 할수록 탈레반에 대한 국제여론은 나빠지고 미국의 아프간침공은 그만큼 정당화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인질로 잡혀있는 우리의 형제자매,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인가.

이제 정부는 단안을 내려야한다. 해답은 오직 하나다. 아프간에 파병된 군대의 철군을 즉시 결정하는 일이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모닝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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