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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조선시대 엽기적인 살인 사건
  • 입력날짜 : 2004. 07.01. 22:31
조선 성종 19년 5월 22일. 임금은 한 여인의 살해범을 반드시 잡으라고 명령한다. 이 여인은 죽은 채로 물에 떠내려 왔는데 시체가 몹시 훼손되어 있었다. 온몸에 상처 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 칼로 도려져 있었다.
임금은 이와 같이 독한 상처를 입은 것은 일반적인 싸움이나 살인이 아니라 필시 사대부 집안의 독살스런 처가 질투심 때문에 첩을 학대해 죽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추적해 범인을 잡아내라고 명령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투기에 의한 최초의 살인 사건은 태조 6년에 벌어진 일이다. 교서감이라는 직위에 있던 왕미라는 자가 종과 간통하자 그의 처가 종을 죽여 길가에 버렸다. 관원이 잡으러 가자 왕미는 처와 함께 도망쳤다.
본처가 첩을 시기하고 질투해 학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세종 9년에 벌어진 집현전 관리 권채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는 본처인 정씨 외에 종이었던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 아내 정씨는 덕금을 몹시 미워하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덕금이 남편 몰래 집을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 갔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아내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기 위해 몰래 빠져나갔다고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화가 난 권채는 덕금을 잡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쇠고랑을 채워 방에 가뒀다.
이제 정씨는 남편의 묵인 아래 덕금을 괴롭힐 수 있게 됐다. 그녀는 덕금을 칼로 베어 죽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되면 남들이 사정을 알게 될까 두려워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음식을 주지 않고 대신 똥오줌을 먹인 것이다.
구더기까지 생긴 똥오줌을 덕금이 차마 먹지 않으려 하자 덕금의 항문을 침으로 찔러 억지로 먹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개월, 덕금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르러 다행히 고발하는 자가 있어 권채는 외관직으로 좌천당하고 아내 정씨는 곤장 아흔 대를 맞는 형벌에 처해졌다.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울고
남편의 사랑을 뺏긴 아내들은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첩이나 남편의 사랑을 받는 종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머리카락 자르기, 두들겨 패기, 성기를 못쓰게 만들기 등이 자주 쓰이는 방법들이었다.
중종 7년의 한 사건을 보면 끔찍하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편과 가까이한 종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돌로 내리쳐 화를 풀고는 죽였다. 남편이 정식으로 맞아들인 첩일 경우에는 갖은 모략으로 우선 남편과 떼어놓은 다음, 학대하거나 창피를 주어 내쫓았다.
첩을 거느리는 것은 권력가의 특권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일부일처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권력을 지닌 남자들은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 혹은 일부다첩이 관행으로 묵인되었지만, 조선 태종 13년에 일부다처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아무리 많은 여자를 거느려도 정식 아내는 하나였다. 양반댁에서는 처와 첩 사이의 보이지 않는 혹은 노골적인 투기와 질투가 횡행하게 되었다.
첩의 신분은 비참한 것이었다. 첩이 낳은 자식은 서자, 서녀가 되어 온갖 신분상의 제한을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첩은 남편의 친족과 친족 호칭 관계를 가질 수 없었고, 죽어도 남편과 함께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무는 많아서 남편이나 정식 부인, 혹은 정식 부인의 소생이 죽었을 때는 길면 3년까지 상복을 입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 정조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 남편을 고소하면 목이 졸려 죽었고, 남편을 배신하고 도망치거나 첩의 신분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 개가하면 모두 엄한 형벌에 처해졌다.
정식 아내들은 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누렸지만, 남편의 사랑을 잃는 것은 그 어떤 지위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첩에 대한 본처의 질투와 가혹한 학대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였다.





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         윤광룡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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