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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신라시대의 대중 목욕탕
  • 입력날짜 : 2004. 06.13. 13:42
"여러 사람 앞에서 옷을 벗다니! 아이구 망측해라."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대중 목욕탕을 지으려 했을 때 한국인들은 이렇게 반발했다. 그래서 조선을 합병한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공중 목욕탕을 짓지 못했다. 공중 목욕탕은 1924년에야 평양에서 첫 모습을 드러냈다.
알다시피 조선의 유교적 관습은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양반들은 혼자 목욕할 때 조차도 옷을 다 벗지 않은 채 필요한 부분만 씻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는 어떠했을까? 고려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노출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을까? 또 신라시대에는?
이런 풍습에 관한 한 우리는 늘 조선시대를 건너뛸 필요가 있다. 신라나 고려에서는 가능했던 일들이 조선시대에는 불가능해졌다가 현대에 재현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대중 목욕탕도 마찬가지다. 대중 목욕탕은 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신라시대의 대중 목욕탕이 엄숙하고 경건하며 청정한 구역인 절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왜 일까? 그것은 신라 사람들의 목욕에 대한 관념과 관계가 있다. 원래 청결을 중요시했던 신라인들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목욕재계를 중시하는 불교 풍습을 받아들였고 목욕에 대한 관념을 심화시켰다.
목욕은 몸을 깨끗이 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마음의 죄를 씻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에 목욕탕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욕재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중 목욕탕 시설을 갖추게 됐다.
대중 목욕탕의 발달과 함께 목욕 용품도 발달했다. 조두(팥과 같은 곡식의 가루로 만듬)도 이때의 발명품이다. 또 조두에서 나는 날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향유와 향수를 생산한 것도 이때다.
화장품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여겨지는 연분 역시 이때에 만들어졌다. 연분이란 백분-곡식이나 분꽃씨, 조개껍데기 등을 태워 빻은 분말-에다 납을 화학처리한 화장품이다.
백분은 얼굴에 잘 붙지 않고 고루 펴지지 않아 얼굴의 털을 일일이 뽑거나 깍은 다음에 발라야 하고, 또 바르고 난 다음에도 20-30분씩 잠을 자야하는 등 대단히 불편했는데, 연분이 발명되면서 이러한 불편도 한꺼번에 해결됐다.
이처럼 몸을 청결히 하고 가꾸는 것을 중시했던 신라인들에게 대중 목욕탕이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목욕 풍습은 신라 때보다 좀더 과감해졌다. 절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 예컨대 냇가에서도 여럿이 함께 목욕을 했으며 심지어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기도 했다.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여기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서긍은 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휘종의 사신으로 1123년 개성에 도착해서 한달 정도 지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 휘종에게 바쳤다.
이 고려도경에는 서긍이 직접 목격해 기록한 목욕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 개울에서 남녀가 함께 어울려 목욕을 했다 한다. 홀딱 벗고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         윤광룡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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