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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역모의 중심지 서당
18세기 훈장 유랑 지식인 많았다
  • 입력날짜 : 2004. 06.03. 00:35
18세기에는 별다른 연명 방법이 없었던 가난한 유랑 지식인들이 서당 훈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식인은 위험하다. 아예 권력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모르되 권력을 얻으려다 밀려나면 역모를 꾸미기 때문이다.
역모를 꾸미는 데 장소가 따로 있을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서당이 자주 들먹거려진다. 그렇다면 서당이 역모의 중심지였을까.
서당은 학동과, 학동 중에 선배가 임명되는 접장, 그리고 훈장으로 이뤄진다. 학동이나 접장은 그 마을 사람들의 아이들이므로 위험할 것도 없다. 문제는 훈장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훈장 중에 유랑 지식인이 많았다. 훈장이라고 해봐야 대우는 먹을 양식, 땔감, 의복 정도였으니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학문 높은 선비나 부유한 양반이 훈장 노릇을 할 리 없어, 문자깨나 한다는 촌로들, 그리고 별다른 연명 방법이 없었던 가난한 유랑 지식인들이 훈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유랑 지식인들 중에는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춘천에서 훈장으로 있던 유봉성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1755년 6월 1일. 춘천부사(종3품)가 하루아침에 춘천현감(종6품)으로 곤두박질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졸지에 여섯 계단이나 떨어진 것인데 수령뿐만 아니라 춘천부도 춘천현이 되어버렸다.
춘천부 출신 유봉성이라는 사람이 역모에 가담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특정지역 출신이 역모에 가담해 처벌되거나 그 고을에서 흉악한 일이 벌어지면 고을의 지위도 떨어뜨리고는 했다.
유봉성은 서당 훈장이었다. 그는 생계가 어려워 훈장을 했는데 학동들의 교육비를 모은다는 취지로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서당계를 조직했다. 서당계란 서당을 짓고 훈장을 모시고 교육을 위한 책을 사는 등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고을 양반들이나 촌민들의 계였지만 유봉성이 역모의 모의에 가담하면서부터 서당을 새로 짓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 계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몰락한 소론 출신들인데 당시의 집권세력인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봉성의 계획은 제법 거창했다. 첫째, 지방의 유랑민, 굶주린 백성들, 승려 등 불만세력을 광범위하게 끌어모은다. 그리고 이들에게 불교의 미륵신앙과 유교적 이상사회론을 결합, 선동한다.
둘째, 규합된 세력의 힘을 빌어 춘천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서울로 진격한다. 그러나 유봉성은 거사하기도 전에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아들은 종으로 팔려가고 만다. 역모의 주역이었던 심정연이 먼저 잡혔기 때문이다.
1755년 5월 2일, 영조는 나주벽서 사건을 처리한 후 그를 축하하는 뜻으로 과거시험을 개최했다. 이때 심정연이 참여했는데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고 노론 대신들의 잘못을 적은 글을 미리 만들어 가지고 시험에 참여,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이를 제출했다.
그리고 꾀를 써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 또 다른 글도 써서 냈다. 그러나 그가 소론으로서 처벌당한 심성연, 심익연의 동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체포되고 말았다. 심정연은 5월 4일 처형되었고, 유봉성도 5월 22일에 처형되는 등 역모를 꾀한 소론일파가 일망타진 되었다.
이처럼 18세기에는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집권세력에 대한 원한과 왕조에 대한 변혁의지를 불태우고는 했다. 그러나 당장의 생계도 급했고, 또 연락 거점도 필요했기 때문에 유랑 지식인들을 받아주던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김홍도의 유명한 서당 그림이 있다. 풍채 우람한 훈장이 한심하다는, 어찌 보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다.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 훈장은 울고 있는 아이를 애처롭게 바라보지만, 사실 아이들과 티격태격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모닝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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