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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되짚기] '말하는 짐승' 노비
노비매매빙자 인신매매 사건도 발생
청지기, 상노, 안잠자기, 상지기에 식모
  • 입력날짜 : 2004. 04.21. 14:33
한글로 작성된 노비 호적문서.
삼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그 어떤 시대에도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 대. 후기의 태평치세라는 영·정조 대에도 노비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한줌도 안되는 귀족과 양반이 오로지 글공부나 하고 국가 백년지대계 운운하는 동안 '말하는 짐승'들은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렸다. 양반집이면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조선의 노비들 역시 대대손손 노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에 성호 이익 같은 이는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 그 괴로움을 받게 된다"며 안타까워 했다.
노비들은 심지어 말(馬) 보다도 값이 쌌다. 1398년 7월 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五升布) 1백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값은 4, 5백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은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살에서 40살까지는 4백 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전시에는 노비의 값도 더욱 폭락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1마리와 노비 10명을 맞바꿨다고 한다. 조일전쟁 당시 말 1마리 값이 은자 10냥 정도(전쟁에 쓰인 큰 말은 더 비쌈)라고 했으니 노비 1명의 값이 은자 1냥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는 동산(動産)이었다. 재산상속을 할 때는 일일이 노비의 숫자를 셈하여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노비들은 주인집의 상속에 즈음하여 부모자식 간에 생이별을 하기가 다반사였다.
노비 매매를 빙자해 멀쩡한 양인을 납치, 노비로 팔아먹는 인신매매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숙종 44년(1718년)에 사헌부가 올린 장계를 보면 이러한 인신매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북도는 원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이어서 노비의 값이 남쪽 지방보다 몇 갑절 비싸,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이렇게 되니 인신매매범들이 남쪽 내륙으로 내려와 양민과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공천(公賤), 사천(私賤)의 부류들을 유인해 속여 데리고 가서 마음대로 팔고 사면서 큰 이익을 취했다고 한다.
이에 사헌부는 청하기를 도망간 노비는 일일이 찾아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불법으로 인신매매한 장사꾼은 조사해 반드시 잡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값이 매겨지면 그것으로 장사하는 인간이 또 생기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노비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었다. 주인 나리의 심부름을 하는 청지기, 상전이 외출할 때 수행하던 상노, 안방마님의 시중을 들며 이야기 상대를 해주는 안잠자기, 마님의 몸종인 상지기, 밥을 짓는 식모나 찬모, 바느질 하는 침모 등도 노비나 다름없었다.
이들 역시 매매의 대상이었는데, 동학혁명 당시에는 소 1마리에 미모의 계집종 하나를 포함한 5명의 노비와 맞바꾸었다.
행랑아범, 행랑어멈 등이 이 시대에 생겨났는데, 비록 주인집의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지만 노비처럼 매매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비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때 폐지됐다.



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         윤광룡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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